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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

[리뷰] 파친코 영어 오디오북

요새 화제가 되고 있는 이민진 작가의 '파칭코'를 며칠 동안 오디오북으로 들었다. 동네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고 싶었지만 대기자가 많은 인기 작품이라, 바로 빌릴 수 있는 오디오북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는데, 밀린 집안일을 하면서 책을 접할 수 있어서 좋았다. 호주에 거주하는 재외 한국인으로서, 또 일본에서 유학을 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여러모로 감정이입을 하게 되는 작품이었다. 영어로 된 작품이지만 일본어와 한국어 단어가  자주 혼용되어 있어서 세 언어에 어느 정도 익숙한 나는 다른 독자들에 비해 작품의 이해도가 아주 조금 높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조금 다를 수 있는 나만의 감상 포인트 몇 가지:

 

도서관 오디오북 앱에 사용된 책 표지

- 이 책은 영어 독자들에게 술술 읽히게 쉽게 쓰인 책이다. 원작이 외국어로 된 작품은 번역에서 오는 문장의 어색함이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민진 작가는 7세에 이민을 갔다고는 하지만 영어가 주 언어인 작가이기 때문에 지극히 영어스러운 표현이 많다. 등장인물들의 사소한 행동을 묘사하는 부분에서, '이런 말을 한국어로 한다고?'라고 의구심이 든 지점이 꽤 많았다. 물론 의역으로 생각하면 괜찮다. 하지만, 언어의 관용적 표현은 문화적인 습관이 내포되기 마련인데, 한국의 문화에서 없는 행동이나 관습이 영어적 표현과 함께 등장한 적이 여러 번 있어서, 한국의 문화를 너무 보편적으로 표현했다는 아쉬움이 따른다. 한국에 대한 지식은 풍부하지만 한국에서 보낸 기간이 길지 않은 작가가 갖는 한계일까? 하지만 반대로 이 점이 영어로 읽기 편하게 만들어 주긴 한다.

 

- 등장인물의 대화에서 영어와 일본어, 그리고 한국어 단어가 많이 혼용되는데, 특히 일본어 어미인 'ね(네)'를 문장의 마지막에 붙여서, 등장인물들이 지금 일본어로 대화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 적이 많다. 예를 들어 'Let's have dinner soon 'ね'라고 친밀감을 나타내는 '그렇지?' 아니면 '그러자'라는 뜻이 있는 어미를 붙어서 등장인물 간의 관계성이나 분위기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런데, 이게 너무 아무 문장 끝에나 다 갖다 붙여서 어떤 문장에서는 전혀 적당하지 않은 표현이 되어버린 곳이 몇 군데 있었다. 한국어의 혼용은 일본어보다는 적었는데, 주로 '아주머니'같은 호칭이나 음식이나 물건의 고유명사가 사용되었기 때문에 일본어가 사용될 때보다는 어색함이 적었다. 아쉬웠던 점은 '아주머니'가 너무 많이 사용되었다는 점 정도. 아줌마가 더 자연스럽지 않나?

 

- 파칭코라는 제목의 의미를 생각해보지 않고 듣기 시작했는데, 책의 1/4 지점에서 핀볼 머신이 예측하지 못하는 인생과 같다는 내용을 접하고 나서야 뒤늦게 제목을 참 잘 지었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등장인물들의 삶에 파친코가 깊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파칭코가 상징하는 비주류의 삶,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현실을 견디는 삶이 책의 주된 내용이기도 하다. 선자가 일본으로 건너갔을 때 튕겨나간 핀볼들이 사방팔방으로 흩어지고 마지막 장에서 움직임을 멈추었을 때까지, 그녀의 인생은 정말 상상하지 못하는 방향으로 그녀를 이끌어간다.

 

- 파칭코가 단순히 재일교포들의 고된 삶을 조명하는 책이라고 생각했는데, 책의 마지막 장까지 다 듣고 나서 드는 생각은, 한국판 '여자의 일생'이었다. 책에선 선자의 혼전임신, 일본으로의 이주, 그 이후에 일어나는 전쟁, 생존을 위한 끊임없는 노동이 일본 강점기부터 20세기 말을 배경으로 펼쳐지면서, 그녀의 삶에서 가지를 뻗어나간 아들들과 주변 인물들의 삶을 그려낸다. 마지막 장을 들으면서 나도 모르게 울음이 터져 나왔는데, 비슷한 시절을 한국에서 살다가 가신 돌아가신 할머니의 인생이 생각나서였다. 어린 나이에 사랑도 없는 남편에게 시집을 가고, 오직 자녀들을 위해 결혼생활을 견뎌내시다 돌아가신 나의 할머니. 그녀의 삶도 선자의 인생 못지않게 고생과 한으로 점철되었고, 신앙의 힘으로, 초인 같은 의지로 모든 역경을 이겨내셨다. 재일교포뿐이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아내야 했던 여성들, 특히 전쟁 이후의 후진국 여성들의 삶은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고난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할머니의 희생 덕분에 나의 아버지는 안정적인 직장에 취직을 했고, 이민을 신청할 수 있을 정도의 경력과 자격을 갖추실 수 있었다. 가장 중요한 건, 외아들의 이민을 선뜻 허락하신 할머니의 사랑이었다. 할머니가 극구 반대를 하셨다면, 나의 가족은 이민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책 속의 여러 장면에서 나의 할머니의 희생이 떠올랐다. 그래서 울 수밖에 없었다.

 

- 재일교포, 한일 혼혈의 등장인물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일본 유학시절 알게 되었던 소수의 사람들이 생각났다. 호주 여권을 가지고 일본에 갔기 때문에 영어식 이름으로 불려서 그런지 온전한 한국인 취급을 받지 않았던 유학 생활을 보냈다. 어중간한 차별을 받았다고나 할까? 한국에 대해 나쁜 말을 하면서, 넌 호주에서 왔으니까 니 얘기는 아니야, 라며 돌려 까는 식이다. 재일교포인 것을 나에게 밝힌 사람은 정말 소수였고, 일본인들에게 들은 재일교포 이야기들도 밝은 이야기는 아니었던 것 같다. 친하다고 생각했던 일본인 친구가 한일 혼혈이라는 사실을 우연히 다른 사람에게 들었을 때는 정말 충격이었다. 결국 재일동포인 친구는 한 명도 사귀지 못했는데, 한국인이라는 공통점이 있었지만, 재일교포가 아닌 내가 그들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어서 그랬을 수도 있겠다. (물론 그냥 나랑 친구 하기 싫었을 수도)

 

- 마지막으로 오디오북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해야겠다. 이름으로 봐서는 백인 성우인데, 성우의 잘못이 아니라, 프로듀서가 성우에게 기초적인 한국어 발음 연습을 전혀 시키지 않았다. 녹음 전에 5분이라도 한국인 네이티브 발음으로 '아주머니', '파전' 등의 발음을 연습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문화적 감수성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디렉팅이 내내 아쉬웠다. 이민진 작가가 오디오북 회사한테 한마디 좀 해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