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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폰스 무하 전시회 - 2024년 @NSW 미술관 - (3)

전시회의 출구가 점점 가까워지면서 아쉬운 마음도 들었지만, 4시간 정도 전시회장을 누비고 다닌지라 다리가 슬슬 아파오기 시작했다. 음악소리가 들리는 공간으로 들어서니 사면이 스크린으로 된 방이 나왔다. 무하가 인생의 역작으로 여기고 작업한 '슬라브 서사시'의 그림을 스크린에 영사하고 있었다. '슬라브 서사시'는 크기 때문인지 이동이 되지 않아서 디지털 전시를 하고 있었는데, 그림의 작은 요소들이 살짝 움직이거나, 불빛이 깜빡거리고, 낙엽이 떨어지는 3D효과가 가미되어 있었다. 다행히 작품을 감상하는데 방해가 되지 않을 정도의 귀여운(?) 특수효과였다. 사람들이 워낙 많고, 가운데 앉아서 볼 수 있는 자리도 제한되어 있어서 잠시 머물다가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엄청난 크기 때문에 화면에 낙엽이 떨어지기 시작하자, 내가 그림 속에 들어와 있는 착각이 들었다.
사이비 종교의 의식? 그냥 강강수월래? 가운데 나무 위의 여신같은 존재는 숲의 정령일까? 여러 화풍이 혼재하는 점이 특이했다

 

사람들이 많아서 사진찍기가 쉽지 않았다. 보면 볼 수록 섬세한 디테일이 새롭게 발견되어서 빠져들게 된다
중세 시대의 한 장면인 줄만 알았는데 이제 보니 미국 국기가 보인다! 빛과 어두움의 조화가 반복되어 있는 점이 특이하다
은은한 배경이 마음에 들었다. 신기루같은 희망의 궁전일까? 빈부의 차이를 표현한 것인지도
홀로그램같기도 하고, 외계인같다는 느낌도 받았다. 고전적인 화풍때문에 무하가 20세기를 살던 사람이라는 사실을 자꾸 잊게 된다.
공중에 떠다니는 사람들과 동물들이 처음에는 그림 위에 다른 그림을 오려서 붙여놓은 것인 줄 알았다. 두가지의 화풍으로 공간감을 만들어낸 아이디어가 천재적이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오래 볼 수 없어서 아쉬웠다. 언젠가 직접가서 보리라!
슬라브 민족의 역사를 기록하는 역사학자들인걸까? 찬찬히 살펴볼 수록 여러 인물들의 이야기들이 상상되어졌다.
추운 겨울날 피난민들이 힘겨운 밤을 보내고 있다. 작품 설명이 없어서 내 상상에 의지해 보았다.

 

여러 인종과 문화가 공존하는 시대의 재판정의 모습인듯. 중요한 역사의 한 장면인듯 싶다.

 

승천하는 중? 하니면 누군가를 수호하는 중? 배경에는 전쟁이나 약탈이 진행되고 있는 듯

 

무하에게 상업적인 대성공을 안긴 대표작들도 참 좋았지만, 그의 '슬라브 서사'를 마주하고 나서는 그의 숭고한 예술 정신에 존경심이 들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동포애와 애국심을 표현하고 유럽의 평화를 기원하려고 했던 그의 목표의식에 대해 알게 되니, 나의 인생의 목표는 무엇인지 돌아보게 되었다. 그는 처음부터 천부적인 재능을 인정받은 것은 아니었지만 해를 거듭하고 작업을 계속할수록 자기만의 스타일을 구축하고, 변화시키고, 다른 기교를 습득하고, 그것을 또 자신의 스타일에 융화시키면서 작품세계를 확장시켰다. 이런 멋진 예술가를 지금까지 몰랐던 것이 아쉬웠고, 이제라도 알아서 너무 다행이었다. 이번 전시회에서 느낀 점 몇 가지:

 

- 내 삶에는 아름다움이 더 많이 필요하다! 내 자신이 아름다워지면 제일 좋겠지만 그게 힘들다면, 자연과 예술의 아름다움을 더 많이 시야에 담고 싶다. 옷도 액세서리도 좀 더 신경 써서 조화를 추구하고 싶다. 센스가 없어서 탈이지만 아름다움이라는 가치를 일상에서 더 많이 고려하고, 접하면서 살고 싶다. 무하가 디자인한 포스터, 책표지, 광고지들이 열광적으로 대중의 사랑을 받은 것도, 그의 작품의 아름다움을 조금이나마 소유하고 싶어 했던 사람들의 열망이 있어서였다. 산업혁명을 겪으면서 기계화되고 오염되어 가는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무하의 아르누보풍의 작품들이 주는 순수한 아름다움이 필요했던 것이 아닐까? 요즘 직장 스트레스로 삭막한 일상을 살아가는 나에게도 그것을 상쇄시킬 아름다움이 필요하다!

 

- 무하의 작품들을 보는 동안에는 일상의 스트레스와 사소한 고민들을 잊을 수 있었다. 삭막했던 마음에 촉촉이 단비가 내린 것 같았다. 최근의 난, 직장이라는 작은 세상에 갇혀서 아주 좁은 시야를 가지고 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다. 더 넓은 세상을 인지하며 살아가야겠다고 느꼈다. 내 문제만 생각하지 말고, 무하처럼 조국을, 평화를, 자연을 마음에 품고, 넓은 세상으로 눈길을 주며 살아가고 싶어졌다. 지금 고민하는 것들은 1년 후, 5년 후, 10년 후, 기억조차 나지 않을 것인데, 그런 일들에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 더 영원하고 충만한 것들을 생각하며 행복해지고 싶다.

 

- 보통 성공한 아티스트들은 조강지처를 버리거나 방탕한 생활을 하게 된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그게 성공의 자연스러운 대가라고까지 생각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무하는 성공을 하고 나서도 좋은 남편, 좋은 아버지였고, 애국자였으며, 죽을 때까지 자신의 예술을 연마하는 장인이었다. 성공을 하고 나서도 겸손히 자기의 길을 가는 사람들도 있다는 사실이 반가웠다.

 

- 고양이들과 집에서 있는 게 제일 좋기도 하고, 특별히 가고 싶은 해외여행지도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무하의 '슬라브 서사시'를 보기 위해서 프라하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론가 멀리 여행하고 싶다는 마음이 든 것이 정말 오랜만이다. 예술 작품을 직접 마주하는 경험은 정말 특별하다.

 

- 무하의 아르누보 작품들에게 왜 강하게 끌리는지 생각해 보았다. 부드러운 파스텔톤 색상. 원만한 곡선들, 다양함과 규칙성이 공존하는 배경의 무늬들. 늘 배경에 자리하는 원형. 순수하고 신비로운 표정의 여인들. 생명력이 가득 찬 꽃들. 은은한 전체적인 분위기와는 상반되는 검은색의 외곽선들. 조화롭고 여성적이다. 모든 것이 완벽해 보이는 찰나의 순간이 마치 영원할 것처럼 포착되어 있다. 산업화된 문명의 흔적은 아예 없고, 오직 인간과 자연이 조화롭게 존재한다. 이 모든 것이 현대를 살아가는 나에게서 결여된 특징들인 것일까? 매일 전자기기에 둘러싸여서 자연과 단절되고, 특별히 내가 여성이라는 자각을 하지 않으면서 살아가고 있어서인가? 외부에서 오는 스트레스에 대한 반동으로 강하고 부정적인 생각과 언행을 반복해서, 내 안에는 부드러움, 따스함, 섬세함 같은 성질이 사라져 버렸나? 난 왜 무하의 작품과, 아름다움이라는 가치에 이토록 매료되었는지 계속 생각하고 있는 중이다.

 

- 무하는 프라하 미대에 입학신청을 했지만 낙방을 했고 그 후로 30대 중반까지는 출판사와 극장에서 일을 하며 찬찬히 커리어를 쌓아갔다.

중간에 스폰서의 도움으로 몇 미술 대학에서 공부를 하기도 했는데, 미술적인 기교를 스펀지처럼 빨아들이며 일취월장을 해나갔다. 물론 재능도 탁월했겠지만 재능을 뒷받침해 준 그의 성실함도 엄청났을 것이다. 일명 '무하 스타일'이라는 아르누보의 화풍으로 국제적 명성을 얻었음에도 거기서 멈추지 않고 계속 기교적 성장을 해 나갔다. 나중에는 민족주의와 종교적 표현까지 아우르며 확장시켜 나갔다. 요즘 여러모로 내 인생이 지금에 안주하고 발전성이 없다고 느끼고 있던 참이었다. 나는 어떤 식으로 내 인생을 확장시켜 나갈 수 있을까? 내가 더 연마할 수 있는 내 삶의 부분은 무엇일까?

 

- 무하의 '슬라브 서사시'에서는 한 화폭 안에 (내 눈에는) 두세 가지의 스타일이 공존하고 있다. 무하가 지금까지 배워온 여러 기술과 특징들을 융화시켜서 새로운 그 만의 질서를 창조해 내었다. 의미가 없고 연관성이 없다고 느껴졌던 인생의 여러 굴곡들과 교훈들을 한 곳에 모아놓고 새로운 의미를 창조해 낼 수는 없을까? 그것이 내게는 글쓰기나 작곡이 될 것인가? 아니면 또 다른 영역의 무엇?

 

내가 받은 감동의 이유가 무엇인지 곱씹다 보니 과하게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여운이 길게 남았고, 한 손에 꼽을 만큼 특별한 경험이었다. 이 감동이 내 안에서 뚜렷한 화학적 반응을 만들어 내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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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폰스 무하 전시회 - 2024년 @NSW 미술관 - (1) 

알폰스 무하 전시회 - 2024년 @NSW 미술관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