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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념들

여행의 기쁨 - 7년만의 한국 방문기

난 여행을 잘하지 않는 편이다. 주변에는 휴가 때마다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여행을 하는 사람들이 몇몇 있다. 대다수가 일 년에 한 번은 여행을 하는 것 같은데 난 무려 7년 동안 거의 여행을 하지 않고 살았다. 1박을 한 여행은 올해 초 같은 NSW주에 있는 Jindabyne에 2박 3일로 다녀오고, 오는 길에 캔버라에 잠깐 들른 것이 전부인 것 같다. 물론 7년 동안 당일치기 나들이는 꽤 자주 다녔다. 시드니 근교로 등산을 많이 다니고, 예전에는 기차 노선표에서 가보지 못한 역으로 자전거를 가지고 가서 기차 여행을 하던 적도 있었다. 얼마 전 인터넷에서

사람마다 여행을 좋아하는 이유가 다르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어떤 이는 숙소와 교통편을 예약하는 단계에서 재미와 설렘을 느끼고, 어떤 이는 짐을 싸는 과정, 혹은 기대감을 가지고 공항에 가서 기다리는 그 시간들을 즐기고, 어떤 이는 맛집을 찾아다니거나 새로운 음식을 먹어보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열 가지 정도 다른 이유들이 열거되었는데, 난 그 글을 읽으면서 단 하나도 특별히 공감되는 부분이 없었다.

내가 당일치기 여행만 고집하는 몇 가지 이유는 다음과 같다:

 

- 해외여행은 환전, 비자 등 신경 써야 할 일이 많다 --> 실수하지 않기 위해 신경 써야 해서 스트레스받음

- 여행 날짜, 기간, 장소을 정하고 항공권을 구매하는 것에 어려움을 느낀다 --> 최저가를 사고 싶어서 검색을 많이 해서 피로감을 느낌

- 여행지에서의 일정을 소화하는 것에 피로함을 느낌 --> 이왕 왔으니 최선을 다해서 경험해야 한다는 마음에 많이 돌아다녀서 피곤함

- 지인이나 친척을 방문할 때, 혹은 동행할 때 배려하고 실수하지 않기 위해 신경 써서 스트레스를 받음

- 운전을 하면 피곤해서 사고의 위험이 있고 장시간의 비행은 몸이 피곤함.

- 이 모든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피곤하게 시간을 보내는 것이 금전적으로 사치라고 느낌 --> 집에서 쉬는 게 돈도 안 들고 몸도 편함.

 

대충 스트레스+귀찮음+경비 때문인 것 같다. 하지만 이번에 다녀온 7년 만의 한국 여행은 이런 핑계들을 댈 수 없는 중요한 여행이었다. 할머니가 이제 100세가 다 되셔서 같이 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위기감에 한국 방문을 더 이상 미루지 못한 것도 있었고, 당시 투병 중이었던 친척언니와도 같이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였다. 그때만 해도 언니는 내가 오면 같이 국내 여행을 하자며 나를 공항에서 픽업하는 것부터 일정을 계획해 놓을 만큼 의욕이 넘쳤고, 우리는 내가 한국에 갈 때쯤에는 언니가 다 회복되어서 같이 여행을 다닐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언니는 너무 빨리 하늘나라에 가게 되었고, 내 여행의 목적은 할머니 방문과 언니의 남은 자취를 보러 가는 두 가지로 변경되었다. 할머니 때문에 여행을 취소할 생각은 없었지만, 그저 할머니 곁에서 조용히 시간을 보내면서 쉬다가 돌아올 생각이었다.

 

그랬던 나의 텅 빈 일정은 뜻밖에도 여러 일정으로 촘촘히 메워지게 되었다. 대전에서 쭉 머무르면서, 대전에서 제일 유명한 '성심당'을 가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 (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강박이 발현된 것이다) 아침 일찍부터 가게 앞에서 줄을 서서 유명하다는 케이크를 사기도 하고, 매일 저녁 외삼촌과 야구 중계를 보면서 야구에 빠져서, 급기야는 고모의 도움으로 야구 경기 직관도 하게 되었다! 경주에서 친구를 만나려던 계획도 변경해서 대전에서 때 마치 열리고 있는 반 고흐의 전시도 다녀오고, 공항에서는 어릴 때 보고 만나지 못했던 사촌동생이 배웅을 나와주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내가 한국에 간다는 연락도 드리지 못한 고모들, 또 자주 뵙지 못하는 둘째 외삼촌과도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기회도 생겨서 감사했다. 그 밖에도 여행 일정 내내, 친구, 친척들과 메시지를 하고 전화 통화를 해서, 많은 사람들의 사랑과 배려를 느끼며 시간을 보냈다. 물론 친척언니가 자연으로 돌아간 곳에도 다녀오고, 할머니와도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특히 귀가 안 좋으셔서 몇 년 동안 가지 않으셨던 교회에 함께 모시고 갈 수 있어서 참 좋았다.

 

어제 아침에 돌아와서 여독을 푼다는 핑계로 이틀째 쉬고 있는데 살짝 우울감이 느껴질 만큼 한국에서의 시간들이 그립다.

곰곰이 생각해 본 이유들 몇 가지:

- 다른 일정 없이 할머니와 일상을 보내겠다는 마음으로 갔다. 그래서 할머니와의 시간도 즐거웠고, 다른 특별한 일정이 생기면 감사했다. 

- 할머니의 단순한 일상을 따라 하다 보니 마음이 평안했다. 바쁜 일정 없이 그저 식사를 하고, 잠깐 집안을 돌아보고, 소일거리를 하는 조용한 일상에서 내 안이 채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할머니가 날 보고 웃으시고, 날 찾으실 때면, 한국에 오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 여행 중이라고 특별히 챙겨주시는 삼촌들, 외숙모, 이모, 고모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모두들 그 어떤 잔소리도 안 하시고 그저 잘 대해주시기만 하셨다.

- 할머니 다음으로 제일 시간을 많이 보낸 사람이 넷째 외삼촌인데, 외삼촌과 야구를 같이보고, 블로그 만드는 법 알려드리고, 책이나 일상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즐거웠다. 알면 알수록 나랑 삼촌이 비슷한 점이 꽤 많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 흥미로웠다.

- 고모들, 특히 막내 고모가 야구장 티켓을 구해주신 것이 제일 큰 감동이었다. 새로 생긴 한화 야구장에 가보고 싶어서 티켓이 없으리라 짐작은 했지만 예매사이트에 들어가 보기나 하려고 노력했었는데 자꾸 인증이 실패해서 포기했던 중이었는데, 고모가 이 소리를 들으시고는 금세 티켓을 구해주셨다. 알고 보니 야구팬인 사촌동생이 능력을 발휘해 준 덕분이라고 했다. 막내고모와, 나, 그리고 외삼촌이라는 다소 특이한 조합으로 야구장에 갔는데 우리 팀이 대승을 거두는 것을 직관하는 행운을 누렸다. 고모가 팀모자까지 사주심! (이 모자는 이제 내 신체의 일부가 될 예정)  넘치는 사랑과 배려에 행복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 셋째 외삼촌은 어렸을 때 뵌 적이 없지만 성인이 되고 나서 한국에 가면 늘 할머니와 나를 데리고 외출을 시켜주셨는데 이번에도 동물원에

데려다주셨다. 겉으로는 무뚝뚝한 인상이신데, 알면 알수록 속정이 많으시고 (츤데레) 섬세하게 할머니와 나를 챙겨주시는 좋으신 분이라는 걸 이번 기회에 알게 되었다. 새로운 삼촌이 한 분 더 생긴 느낌이랄까?

- 독일에 사는 친구와 일정이 맞아서 대전에서 같이 반고흐 전시회에 다녀왔다. 꽤 정기적으로 수다를 떠는 사이라서 오랜만에 만나도 거리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늘 목소리만 듣던 친구와 얼굴을 마주하고 시간을 보낼 수 있어서 좋았다. 같이 또 성심당도 갔다!

- 평소에는 퇴근하면 고양이 둘과 조용히 저녁시간을 보내는 것이 당연한 일과였는데, 열흘간은 누군가와 매일 같이 식사를 하고 함께 티브이를 보고 대화를 나눴다. 사람에 둘러싸인 일상이 내향인인 나에게 버거울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더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여행 중이라 일에 대한 고민도 없고, 오랜만에 방문한 손녀와 조카에게 무한의 배려를 해주신 덕분이리라.

 

이번 여행 후 변화한 점들 몇 가지:

- 매일 한화의 야구 중계를 틀어놓는다. 집중해서 보기도 하고, 그냥 백색소음으로 틀어놓고 집안일을 하면서 오다가다 잠깐씩 경기결과를 확인하기도 한다. 고양이들과 함께하는 조용한 일상이 약간 쓸쓸하게 느껴지는 요즘이다.

- 야구 이야기를 누군가와 나누고 싶다! 경기를 보면서 외삼촌과 친구에게 톡을 보내며 귀찮게 하는 중이다.

- 난 내향인이 아닌 걸까? 사람들과 함께 있어야 에너지를 받는 성향인데 모르고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나이가 들면서 외로움을 더 느끼게 된 걸까?

- 고모가 사촌동생을 통해서 야구경기표를 구해주신 계기로 사촌동생들과도 야구 이야기를 하며 연락을 자주 하게 되었다. 다음 주 월요일은 한화 대 삼성경기를 보러 가는 고모 가족과 톡을 하며 경기를 볼 예정이다. 미리 경기를 보면서 먹을 간식까지 사뒀다!

- 고모가 사주신 한화모자를 쓰고 출퇴근하고 있다. 여기서는 무슨 모자인지 모르겠지만 혹시 어디선가 한화팬이 나를 본다면 알아볼 수 있지 않을까? 실낱같은 희망에도 일상에 깨알 같은 활력을 받고 있다.

- 내 일상 속에 친밀한 관계가 부족했었나 돌아보고 있는 중이다. 매일 대화를 나눌 사람이 있는 일상을 특별히 부러워하지 않고 살았는데 너무 뒤늦게 눈을 뜬 게 아닌지 모르겠다. 누군가와 식사를 같이하고 야구 이야기를 하며 저녁시간을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인다.

 

코로나 때문이기도 하지만 7년 만에 한국을 방문하고 보니 어색한 점도 좀 있었다. 고양이들만 남겨두고 오는 게 마음이 편치 않아서 다음에 언제 한국에 또 가게 될지 모르겠지만 7년보다는 짧은 기간 안에 다시 가게 되면 좋겠다. 기대 이상의 추억을 만들고 돌아와서 감사하고 아쉬운 마음을 이곳에 털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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