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휴 내내 감기에 걸려서 집에만 있었다. 오늘 아침에 일어나니 몸 상태가 괜찮은 것 같아서 여느 때처럼 자전거로 출근을 했다. 대신, 모자, 마스크, 장갑, 스카프로 중무장을 하고 눈만 보이는 모습으로 아침 바람을 가르며 페달을 밟았다. 다 나았구나 싶었는데 시간이 갈수록 두통이 심해지고, 기운이 빠졌다. 부서를 옮기는 동료의 송별회에도 못 가고, 점점 속에 짜증이 차였다. 평소에는 그냥 넘어갈 일도 귀찮고 화가 났다. 간신히 일을 마치고는 직장 옆의 마트에서 두통약과 젤리 한 봉지를 샀다. 집에 도착해서 젤리 봉지를 뜯어서 젤리 하나를 입에 넣었다. 통증을 빨리 완화시켜 준다는 문구가 쓰여있는 두통약도 얼른 한 알 삼켰다. 뜨거운 물로 몸을 씻고, 머리를 감고, 손빨래를 하고, 어느새 나는 평상시의 리듬으로 돌아와 있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느 것이 진짜 나의 모습이지? 몸과 마음이 건강하고 체력과 시간에 여유가 있어서 남을 돕고 친절한 미소를 짓는 나는 사실 꾸며진 모습이 아닐까? 인내심이 바닥이 나고, 나의 통증 때문에 남을 생각할 여유가 없고, 모든 게 귀찮고 화가 날 때, 바로 그럴 때 나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모습이 나의 진정한 본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오늘의 나의 모습은 그리 보기 좋지 않았다. 누군가 나의 모습을 몰래 촬영해서 보여줬다면, 부끄러워서 고개를 들지 못했을 것이 분명하다. 내가 최악의 상태일 때도 때에도 학생들에게 미소를 지어주고 인내심 있게 기다려줄 수 있는 사람이고 싶은데, 전혀 그러질 못했다. 어떻게 하면 나의 진짜 모습을 개선시킬 수 있을까? 뾰족한 해결책은 생각나지 않지만 다음번에는 이런 나의 부끄러운 모습을 감출 수 있도록 준비해 두어야 할 몇 가지:
- 두통약은 늘 상비하자. 머리만 덜 아팠어도 오늘 하루가 그렇게 길게 느껴지지 않았을 것이다.
- 몸이 별로일 때는 일을 미루고, 사람들과의 접촉을 최소화하자. 혹시나 실수나 실언을 하면 며칠 동안 혹은 더 오래 스트레스에 시달리게 되니까.
- 병가를 내는 것을 주저하지 말자. 차라리 오늘 병가릉 내었으면 좋았을 텐데, 비정규직으로 오래 일한 후유증인지, 병가를 내는데 눈치를 보개 된다. 내일은 빠질 수 없는 수업이 있어서 병가를 못 내는데 차라리 오늘 일을 쉬었다면 좋았을 뻔했다.
- 젤리를 사자! (응?). 젤리가 날 내게 다른 이들에게 미소를 지어 줄 에너지를 준다면 죄책 감 없이 젤리를 사자!
결론: 젤리 만세. 내일은 더 잘해보자.

'상념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행복] 유난히 행복했던 날 - 식욕과 행복의 상관관계? (3) | 2025.06.11 |
---|---|
겨울 연휴 주말의 상념들 (2) | 2025.06.07 |
친구의 웨딩 케이크 - 특별한 날의 정의 (3) | 2025.06.05 |
정전 속의 깨달음 (1) | 2025.06.03 |
한 달 동안 매일 블로그에 글 올린 후 - 뭐가 달라졌을까? (4) | 2025.06.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