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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드니

인생 첫 축구 경기

내 인생 처음 사본 공

 

지금 막 내 인생 첫 축구 경기를 마치고 집에 돌아왔다. 흥분이 가시지 않아서 그런지 잠이 안 올 것 같아서 기록을 남겨보려 한다.

한 달 전쯤, 뜬금없이 직장 동료가 자기 축구팀에 들어오지 않겠냐고 물어봤다. 나이 상관없는 성인 여성팀으로 3개월 여름 한정, 매주 목요일 저녁 9시경에 경기를 한다고 했다. 사실 5년 전쯤 학교에서 아이들이 축구할 때 심판을 봐주다가 축구에 관심이 생긴 적이 있었다. 그때 축구 코치를 하는 지인에게 성인 여성이 축구를 할 수 있는 곳이 있냐고 물었었는데, 내가 완전 초보라고 하니까 힘들 것이라며 만류를 했었다. 그런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쉽게 하겠다는 결심을 할 수가 있었다. 3개월 한정이라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유니폼을 맞추고, 동생에게 신가드를 빌리고, 축구화와 축구공을 사고, 몇몇 친구들에게 축구팀에 들어갔다고 말을 할 때는 신이 났다. 경기가 시작하기 전에, 동료의 남편이 코치를 해주며 두 번의 단체 연습을 했다. 나 혼자 뒷마당에서 나무를 향해 공을 차는 연습을 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깨달은 몇 가지:

 

- 난 내 인생에서 내 소유의 공을 소유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이 축구공이 처음이다.

- 나 혼자 공을 가지고 1분 이상 놀아본 적이 없었다.

- 난 공을 정말 못 찬다. 멀리 나가질 않음.

- 이 팀에서 내가 제일 축구를 못한다! 팀의 최약체!

- 내가 너무 못하니까 즐기면서 하는데 한계가 있다.

 

동료는 내가 취미로 하이킹을 한다는 걸 듣고 내 체력이 좋다고 생각해서 팀에 불러줬을 것이다. 꾸준히 달리기를 하고 있기는 해서 평균 정도의 체력은 되지만, 운동 신경은 전혀 없다는 사실을 그녀가 알리가 없다. 오늘 퇴근을 하고 집에 돌아오니 갑자기 후회가 밀려오기 시작했다. 퇴근하고 와서 엄청 피곤한데, 내가 이걸 왜 한다고 했지? 아, 나 축구 진짜 못하는데, 괜히 민폐만 끼치는 것 아니야? 게다가 몸 상태도 살짝 좋지 않아서 저녁 식사를 마치고 계속 누워만 있다가 간신히 시간에 맞춰서 경기장에 도착했다. 야외 인조 잔디 구장에는 벌써 몇 경기가 진행되고 있었는데, 십대 소녀들이 필드를 날아다니며 공을 차는 모습을 보니 긴장감이 극을 달했다.

 

추석 이틀 후였는데도 달이 휘엉청 밝았다
엄청 잘하던 팀들을 보고 시작하기도 전에 기가 다 죽어버렸음

 

이렇게 의욕 없이 첫 경기에 임하게 될 줄은 몰랐다. 나만 이런가 했는데 한 멤버가 나처럼 엄청 스트레스를 느낀다며 말을 해줘서 조금 안심이 되었고, 둘러보니 다른 멤버들도 조금씩은 상기된 표정으로 경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즌 토너먼트는 6대 6경기로 전후반 20분씩 40분 경기를 한다. 우리는 11명이라 골키퍼 빼고는 5분마다 멤버를 교체해서 실제로 뛰는 시간은 20분 정도이다.

 

공을 잘 못차는 나는 바로 수비로 정해졌다

 

경기를 시작하기 전에 몸을 풀기 위해 잠시 뛰고 짧게 연습 경기를 하다 보니 서서히 의욕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왕 하는 거 최선을 다 해보자. 내가 믿을 수 있는 것은 달리기로 쌓아온 체력밖에 없다. 열심히 뛰기라도 하자.

 

경기 시작하기 전에 코치의 작전을 듣고 있는 우리팀

 

우리의 상대팀은 20대 초반 정도의 어린 백인 애들이었는데 딱 보기에도 팀을 구성한 지 좀 되어 보였다. 우리 팀은 한명 빼고 30대 이상, 대부분 축구 경력이 짧고 (하지만 나 빼고는 운동 신경은 있는 편인) 한 달 전에 결성된 초보팀이다. 으아, 몇 점 차로 질 것인가 걱정부터 들었다. 막 10대 0으로 대패하면 어떡하지? 하지만 경기가 시작하니 그런 생각은 다 날아가 버렸다. 뛸 때는 공에 집중하고, 안 뛸 때는 팀을 응원하느라 아드레날린이 솟구치는 게 느껴졌다. 전반에서는 1대 0으로 꽤 선방을 했지만 후반에 가서 결국 4대 0으로 마치고 말았다. 열심히 수비를 한다고 뛰어다녔지만 어처구니없는 실수도 많이 하고, 나 때문에 1-2골 실점도 했다. 공은 못 차도, 상대방이 쉽게 골을 넣지 못하도록 얼쩡거리기는 해 보자고 노력은 했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눈을 감으면 내가 막지 못한 공이 나를 비켜서 골에 들어가는 장면이 반복해서 보인다. 어떻게 노력해야 더 잘할 수 있는 거지?

 

오늘 첫 경기를 마치고 느낀 점 몇 가지:

- 응원도 잘해야 도움이 되지, 방해가 될 수도 있다. 한 멤버의 남편이 응원차 같이 왔는데 너무 잔소리를 해서, 듣는 내가 민망할 정도였다. 격려가 되는 응원이 아니면 차라리 하지 않는 게 좋은 듯.

- 상대팀에게 내가 낙심한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없다. 내가 운동신경이 꽝인걸 처음부터 알려주지 않아도 된다. 최대한 축구 잘하는 척 보여야지 내가 허점이라는 걸 들키지 않는다 ㅠㅠ 들키는 순간 다들 나를 향해 돌진해 옴!

- 실점을 해도 바로 경기에 다시 집중하자. 자책하는 사이에 또 골을 먹힐 수도 있다.

- 한 명이라도 실력이 있는 선수가 있어야 한다. 다행히 경력이 길고 공을 길게 차는 멤버가 있어서 앞으로는 그 선수 위주로 포메이션을 짤 것 같다.

- 공격도 중요하지만 수비도 그 못지않다. 수비만 잘했어도 비길 수 있다. 수비로서 최선을 다하면 골을 못 넣어도 팀에 공헌할 수 있다.

 

등번호를 고르고 유니폼을 받을 때의 설램을 기억하자

 

이렇게 아쉬움이 많았던 첫 경기를 마쳤다. 일요일 오후에 팀이랑 모여서 연습을 하기로 했다. 동료의 남편이 열정적인 코치라서 큰 도움이 되어주고 있다. 앞으로 몇 멤버들이 휴가를 가서 빈자리가 생기는데 그 공백을 메우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으려나. 경기가 끝나고 단체톡에서 코치가 웃으면서 경기하는 게 제일 중요하다고 격려의 메시지를 남겨줬다. 하지만 그저 재미로 하는 축구인데도, 내가 너무 못하니까 제대로 즐기질 못하겠다. 경기 중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흥분과 쾌감을 충분히 느껴보고 싶다. 한 주에 한 경기씩 조금이나마 실력이 향상되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