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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드니

알폰스 무하 전시회 - 2024년 @NSW 미술관 - (1)(긴글주의)

다른 전시회에 갔다가 알폰스 무하의 전시회의 선전 포스터를 보았다. 어디선가 본 듯한 낭만적인 스타일의 파스텔톤 소녀의 그림에 흥미가 생겼다. 전시회가 끝나기 하루 전인 오늘, 넉넉하게 일정을 잡고 미술관으로 향했다. 며칠 전부터 팟캐스트와 유튜브, 블로그로 알폰스 무하의 약력과 대표작에 대해 약간의 사전지식을 조사한 것 이외에는 무하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 상태였다. 작가가 상업적인 성공을 했다는 내용을 접해서 그런지 팝 아트같이 대중적이고 감각적일 것이라는 인상을 받았고, 솔직히 큰 기대는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전시회에 나보다 먼저 다녀오신 부모님이 아주 좋았다고 말씀을 해주셨다. 특히 아빠는 미술에 크게 관심이 없으신 편인지라, 전시회가 어떤 면에서 대중성이 있을지 살짝 기대가 되기 시작했다.

 

 

전시회가 끝나기 하루 전이라 그런지 입구부터 줄이 아주 길었다. 무하가 그린 가족의 초상화들과 결혼 선물로 부인을 위해 만들어 주었다는 화려한 목걸이가 입구에 전시되어 있었는데 좋은 남편이자 아버지였을 것 같다. 애정이 듬뿍 담긴 시선으로 가족을 바라보며 붓질을 하는 무하를 상상해 보았다. 검색해 보니 사회적으로도 가정적으로도 스캔들 없이 성실하게 살았다고 한다. 여자관계가 복잡했던 피카소, 고갱, 마티스들이 떠올랐다. 벌써 이 때부터 무하에 대한 호감도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무하의 아내. 왼쪽에 있는 장식품 스폰지 밥 같지 않음? ㅋㅋ

 

 

그가 상업적인 성공을 일구었던 기간에는 꾸준하게 꽃과 여인을 주제로 하며, 부드러운 색채감을 유지했다. 그러면서도 작품마다 다른 기교를 구사하면서 꾸준히 자신의 스타일을 발전시켰다.

 

반짝이는 달빛과 별빛을 이렇게 은은하고 사랑스럽게 표현한 작가가 또 있을까
무하의 꽃배경에서 따온듯한 전시회장 벽지

 

 

무하는 사라 베르나드라는 대 여배우의 연극 포스터의 제작에 급하게 참여하게 되는데 일주일도 안 되는 기간 동안 2미터가 넘는 석판화를 완성시켰다고 한다. 다들 크리스마스 휴가를 가서 대신 일할 사람이 없었는데 새해 초 연극이 시작하기 전까지 포스터가 꼭 필요했던 것이다. 이 포스터로 무하의 재능이 파리 도시 전체에 알려지게 된다. 대량 생산을 해서 도시 전체에 붙여야 하는 포스터이기 때문에 석판화여야 했다는데 어떻게 고작 일주일 만에 저런 색의 조합을 만들어 낼 수 있는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엄청난 재능과 성실함이다.

 

 

같은 여배우가 남자 주인공 역을 맡은 연극의 포스터이다. 일본의 타카라즈카를 연상시키는 남장 여자의 멋스러움이 그림 속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용도 멋지고, 배경을 촘촘히 메운 패턴도 중세시대라는 연극의 설정에 어울린다. 여백의 미와 대조되는 단어가 뭐더라? 상단의 용과 하단의 장검과 귀신같은 생명체도 매력적이다. 내가 당시에 이 포스터를 봤다면 남자 주인공 역할이 궁금해서 연극 꼭 보러 갔을 듯.

 

무하의 서명이 개성적이다. 큰따옴표가 밑에 있네?
알렉상드르 뒤마 피스의 '춘희'의 연극무대 포스터. 별로 가득찬 배경이 전혀 촌스럽지 않아!

 

여인의 표정의 복잡 미묘함이 섬세하게 표현되었다. 독사 팔찌가 탐난다.

 

무하는 포스터 디자인뿐 아니라 무대 세트와 의상 디자인 의뢰도 많이 받았다고 한다. 포스터 속의 등장인물이 하고 있는 장신구들을 보고 보석제작회사에서 디자인 의뢰도 받았다니, 그가 창조해 내는 모든 디자인이 당시 대중의 취향을 이끌어갔던 것일까?

 

이건 술 광고. 모델이 약간 성모 마리아 느낌이 나는 이유는 수도원에서 만든 술이여서라고 ㅋ
이것도 술광고인데 클레오 파트라같기도 하고, 이국적 화려함이 돋보인다. 여인의 얼굴에서 클림트 그림체가 엿보인다.
모델이 무하의 딸이었던 듯. 오른쪽 상단의 하트 모양이 좋다.
위의 신앙서에 포함된 삽화 -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라는 기도문을 해석한 그림이라고 한다
뭔가 영적인 내용이다. 무하는 한 때 오컬트와 심령술에 심취했었다고 한다.
작품명은 기억나지 않는데, 초승달 속의 남자가 만화 주인공같아서 맘에 듬.

 

술 광고가 이렇게 사랑스러워도 되는 거냐고! 무하 전시회를 보고나서 핑크가 좋아졌다.
조디악 배경, 이국적인 장신구들, 어두운 녹색의 나뭇잎들 - 의외의 조합이 이루어낸 신비로운 아름다움.
꽃 시리즈 중 장미 - 다리 부분의 가시와 소녀의 강한 시선이 장미의 도도함을 잘 나타낸다. 마법에 걸린 듯 계속 보게 되는 그림.
꽃 시리즈 중 - 카네이션 - 회오리 구름같이 생긴 원형의 배경이 재미있다. 원형은 어디든 꼭 넣어야 하나 봄 ㅎㅎ
꽃 시리즈 중 아이리스 - 사진 속에 조명이 들어간 게 많이 아쉽다.
꽃 시리즈 중 백합 - 너무 예뻐서 넋을 놓고 한참을 보았다. '순수'라는 단어를 그림으로 번역하면 이 작품이 되는걸까?

의뢰가 너무 많이 들어오자 자신의 디자인 방식을 설명한 책을 출판했다고 한다. 그 책을 참고해서 디자인하라는 의미였다는데, 요즘으로 치면 기업 비밀을 공개하는 것 아닌가? 무하는 엄청난 대인배였던 것 같다. 하지만 책이 인기가 많아져서 오히려 작품 의뢰가 더 늘어났다고 하니, 무하는 일복 하나는 끝내주게 타고 난 듯.

 

우리가 잘 아는 회사 네슬레가 빅토리아 여왕을 기념하는 작품을 무하에게 의뢰했다고 한다.

 

빅토리아 여왕의 시대별 모습이 원형 속에 배치되어 있는 아주 특이한 포스터이다. 날 놀라게 한 포인트가 몇 가지 있다:

- 아니 왜 식품회사가 여왕님 헌정 포스터를 만들지? 포스터에는 상품이름이나 모양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저 회사 이름만 있을 뿐인데 그것으로도 홍보 효과가 있다고 판단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 네슬레는 스위스 회사인데 영국 시장을 공략하는 광고를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체코 출신 아티스트인 무하에게 의뢰했다고? 무하의 국제적인 파급력을 가늠해 볼 수 있는 부분이다.

- 공장들이 있는 배경, 금발의 여성, 원형 속의 여왕의 모습, 이 세 부분의 화풍이 다 다르다! 배경은 세부사항이 생략되어 극도록 단순하고, 금발의 여성은 무하의 대표작인 포스터들 속의 여인보다는 단순화된 그림체이다. 원형 속의 여왕의 얼굴들은 포스터의 화풍과 비슷하다. 세 아티스트가 협업을 한 느낌이랄까? 무하가 다중인격이어서 인격이 바뀔 때마다 화풍도 바뀌는 상상을 해보았다. 근데 그건 좀 무섭네.

- 중간에 왕관을 들고 있는 '여신'같은 인물은 누구인가? 역사를 여성으로 의인화한 것인가? 설마 과자의 여신?

 

 

무하가 활동하던 당시, 일본의 판화가 프랑스와 유럽의 화풍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무하의 그림체에서도 일본의 영향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던 것이 나중에는 일본 순정만화 작가들이 무하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전시회의 출구 쪽에는 NSW 갤러리에서 자체 소장하고 있는 일본 작품들과 1960년대 이후로 무하의 영향을 받은 다수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서로 영향을 주고받아 점점 새로운 스타일을 확장시켜 나가는 예술의 사회성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일본 만화에 영향을 준 무하의 작품들은 주로 그가 상업적 성공을 이룬 시기의 작품들이다.

그림의 윤곽을 검은 선으로 그리는 무하의 스타일이 일본 판화의 영향이라고 한다. 무하의 작품의 유일한 단점이 고양이가 없다는 것이라고 동행한 지인에게 투덜거렸는데, 무하 작품은 아니지만 이 작품에서 고양이를 발견해서 다행이었다. 제목이 '여인과 고양이'여서 고양이를 찾기 시작했는데 꽤 시간이 걸렸다. 한 번 찾아보시길 ㅋㅋ

 

고야성이라는 한국인 작가의 일러스트인데 NSW갤러리의 소장품이라 소환된 듯.
이 작품도 별로 무하풍이 아닌데 그냥 소장품이라 전시된 듯 ㅋㅋ
일본 만화의 일러스트 - 무하의 작품 중 조디악 달력있는 것과 구도가 비슷하다.

 

만화 이외에도 70-80년대의 락밴드의 앨범 커버등에서 무하의 영향을 찾아볼 수 있는데 여인+꽃+원형구도의 요소가 특징이었던 시기의 작품들에 한정이 된다. 물론 이 정도의 영향력도 대단한 것이긴 한데 그 후의 무하의 작품세계는 뜻밖의 방향전환을 하게 되고 무하 유니버스는 점차 확장이 된다.

 

[2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