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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드니

합창단 체험기 - 헨델의 메시아

 

공연 수익금은 자선단체에 기부되었습니다

 

 

난생처음으로 합창단에서 공연을 해본 썰을 푼다. 올해 초, 교회 친구 그레이스가 합창단에서 헨델의 메시아 공연을 하는데 한 번 해 볼 생각이 있냐고 물어보았다. 그전까지는 관심이 하나도 없었는데 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뭐에 홀린 듯 바로 하고 싶다고 말했다. 예전 한인 교회에 다닐 때, 성가대 근처는 맴돌았지만 막상 성가대에 서서 노래를 한 적은 없었는데, 마음 한구석에 언젠가는 한 번쯤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나 보다. 공연 날짜는 부활절 성금요일. 연습은 일주일에 한 번 두 시간 반 정도였다. 연습 장소가 차로 35분 정도 걸리는 거리여서 살짝 부담이 갔지만 한 달 반 정도의 비교적 짧은 일정이었기 때문에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헨델의 메시아 악보를 PDF로 다운로드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첫 리허설에 갔다. 소프라노 스무 명 정도, 알토 스무 명 정도에 테너와 베이스는 합쳐서 스무 명 정도 되었다. 대부분은 나이가 지긋하신 분들이었고, 가족과 함께 온 듯한 젊은 사람들이 한 두 명, 삼사십 대는 대여섯 명 정도였다. 지휘자인 스티브는 상당히 부드럽고 유쾌하게 리허설을 진행했는데, 문제는 나의 실력이었다. 악보 읽는 것에는 자신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나의 착각이었던 것이다. 계속 박자를 놓치고 음정을 틀렸다. 집에 돌아와서 메시아를 파트별로 녹음해 놓은 유튜브 채널을 찾아서 알토 파트를 계속 따라서 부르기 시작했다. 다행히 메시아 전 곡을 공연하는 게 아니라서 열 두 곡 정도 연습을 하면 되었는데 생각보다 많은 연습이 필요했다. 매주 리허설에 가고, 매일 집에서 유튜브를 틀어놓고 몇 곡씩 연습을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합창단의 대부분의 나이가 지긋하신 분들은 거의 매년 이 합창단에서 공연을 하고 있고, 심지어 전 곡을 외워서 부르는 사람도 있다고 했다. 어쩐지 다들 너무 여유 있게 잘하시더라니. 초견에는 자신 있다고 자만했던 게 또 한 번 부끄러워졌다.

 

앞에 보이는 의자들도 나중에는 관객으로 다 채워졌다.

 

무대에서 바라본 객석 - 검은 옷 입은 사람이 지휘자 스티브.

 

꽤 성실하게 연습을 했다고 생각했지만 리허설에 갈 때마다 소소한 실수를 하기 일 수였다. 하지만 합창단의 장점이 무엇인가? 나 혼자 무대에 서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자신 없으면 립싱크를 하면 된다! 그렇게 생각하며 리허설과 공연 자체를 즐기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했다. 드디어 공연 당일. 공연장에 사람이 별로 없으면 어떡하나, 관객보다 합창단이 더 많으면 민망할 텐데 어쩌나 살짝 고민이 되었는데 다행히 많은 관객이 객석을 가득 채웠다. 나도 엄마 아빠께 오시라고 말씀을 드렸지만, 두 분 일정도 있으니 솔직히 기대하지 않았는데, 두 분 다 오시고, 직접 초대하지 않은 교회 친구들도 와줘서 참 고마웠다. 공연은 합창단, 파이프 오르간, 오케스트라가 함께 했는데 중간에 전문 성악인들의 독창도 곁들여져 아마추어 합창단으로서는 꽤 괜찮은 공연이 되었던 것 같다. 무대에 서서 노래를 부르면서도 동시에 공연을 즐길 수 있어서 즐거운 경험이었다. 다행히 나도 큰 실수는 하지 않고 넘어가서 연습한 보람을 느꼈다.

 

일주일에 한 번인 리허설이었지만 퇴근 후 피곤한 몸을 이끌고 왕복 한 시간이 넘는 거리를 운전해서 두 시간 넘게 연습하는 게 쉽지만은 않았다. 그랬기에 공연까지 전부 참여할 수 있어서 작은 성취감을 느낄 수 있었다. 연습하는 기간 동안 깨달았던 몇 가지:

 

- 세상에는 꼭 직업이나 돈과 상관없어도 열정만 가지고도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사람들이 많다. 내가 관심이 있는 것에 관심이 있는 다른 사람이 있을 가능성이 있으니 일단 찾아보자.

- 은퇴한 후에 합창단을 취미로 삼으면 좋을 것 같다. 좋은 음악과 사람들과 함께 할 기회를 얻게 된다.

- 헨델의 메시아는 진짜 명곡이다. 많은 시간이 흘렀는데도 수많은 사람들이 계속 연주하며, 감동을 받는다. 시간의 검증을 거친 명곡, 고전들은 한 번쯤 진지하게 접할 가치가 있다.

- 퇴근하고 나서 아무리 피곤해도 내가 즐거우면 취미활동을 할 수 있다. 너무 휴가만 기다리지 말고 학기 중에도 여가시간을 활용해 봐야겠다. 하고 나서 오히려 에너지를 얻는 취미를 찾아보자.

- 단기 프로젝트가 나한테 잘 맞는 것 같다. 장기간동안 뭘 하려고 하기보다, 집중해서 한 두 달 투자하고 작은 성과를 낼 수 있는 개인 프로젝트를 생각해 보자.

- 난 역시 음악이 참 좋다. 음악을 내 일상에 더 적극적으로 포함시켜 보자.

 

즉흥적으로 참여하게 되었지만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어서 좋았다. 합창단이 좋았는지,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것 자체가 좋았는지, 아니면 둘 다였는지 잘 모르겠다. 한 가지 확실한 건, 등산과 함께 내 노후의 여가를 책임져 줄 활동을 찾았다는 것이다. 이제 은퇴만 하면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