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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사

[필사] 허지웅의 '살고 싶다는 농담'

우리 동네 도서관에 한국 신간도서들이 많이 들어와서 신나는 요즘이다. 그중에 연말연시에 읽게 된 책이 '살고 싶다는 농담'이라는 책. 주변에 아픈 이들이 많아서 무의식적으로 고른 것일까?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돌아온 작가의 처절한 고뇌와 투병의 기록이 남의 일 같지 않았다. 오직 경험을 동반한 고뇌에서 얻어진 삶을 살아가는 지혜가 담긴 내용이라 가볍게 읽을 수가 없었다.

 

그중에서 잊고 싶지 않은 글귀, 필사해 놓은 글귀 몇 개를 옮겨본다:

 

 이기는 경험을 쌓으면 패배해도 주저앉아 비관하지 않고 다시 한번, 이라고 말할 수 있다. (p34)


... 불행의 인과관계를 선명하게 규명해보겠다는 집착에는 아무런 요점도 의미도 없다는 것이다. 그건 그저 또 다른 고통에 불과하다. 아니 어쩌면 삶의 가장 큰 고통일 것이다. (p56)

사람의 능력으로 특정할 수 있는 몇 가지 원인을 고치거나 없앤다고 해서 그 일이 벌어지지 않았으리라 장담할 수 없다. 벌어질 일은 반드시 벌어진다. 운명 이야기가 아니다. 충분한 원인과 조건이 갖추어졌기 때문에 결국 벌어질 수밖에 없었던 일이라는 이야기다. 피할 수 없다.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결과를 감당하며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있는 힘껏 노력할 뿐이다. (p57)

피해의식은 사람의 영혼을 그 기초부터 파괴한다. 악마는 당신을 망치기 위해 피해의식을 발명했다. (p152)

시키는 대로 주어진 대로 혹은 우리 편이 하라는 대로 따르는 게 아니라 계속해서 생각하고 의심하고 고민하는 태도만이 오직 바꿀 수 없는 것과 바꿔야 할 것을 구별할 수 있는 밝은 눈으로 이어진다. (p201)


상처는 상처고 인생은 인생이며 불행을 피할 수 없으니 짊어지고 껴안고 공생하는 수밖에 없다... (p257)

내 앞의 불행을 이기는 데 최소한의 공간적, 시간적 거리두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자기 객관화가 가능하도록 마음의 여유를 가능한 빨리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p260)

과거는 변수일뿐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저주 같은 것이 아니다. 앞으로의 삶을 결정짓는 것도 아니다. (p262)

평가에 잠식되어서는 안 된다. 평가와 스스로를 분리시켜야 한다. 마음에 평정심을 회복하고 객관성을 유지하자. (p273)

... 등 떠밀려 아무런 선택권이 없었다는 듯이 살아가는 게 아닌 자기 의지에 따라 살기로 결정하고 당장 지금 이 순간부터 자신의 시간을 살아내라는 것. 오직 그것만이 우리 삶에 균형과 평온을 가져올 것이다. (p274)

 

책의 내용을 관철하는 인용문이 있다. 매일 종이에 필사할 가치가 있는 글인 것 같다.

 

바꿀 수 없는 것을 평온하게 받아들이는 은혜와 바꿔야 할 것을 바꿀 수 있는 용기, 그리고 이 둘을 분별하는 지혜를 허락하소서.

Give us grace to accept with serenity the things that cannot be changed, courage to change the things that should be changed, and the wisdom to distinguish the one from the other. <Karl Paul Renhold Niebuhr>

주옥같은 깨달음의 알갱이들이 입 안에 터지고 목 뒤로 넘어가는 청량한 느낌의 책이다. 영문도 모른 채 겪어야 했던 고통들을 이겨낸 것 만이 아니라, 고통을 통해서 배웠고, 그걸 또 책을 통해 타인과 나누었다. 살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작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