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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그렇게 집사가 된다

입이 짧아서 잘 먹지 않던 햇살이가 요새 부쩍 식성이 좋아졌다. 빼빼 말랐던 녀석이 꽤 통통해졌다. 혹시 임신?? 아빠인 노을이와 늘 붙어 다니니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노을이가 짝짓기를 시도할 때마다 혼내서 그런지 최근에 내 앞에서 짝짓기를 시도하는 모습은 본 적이 없긴 했지만, 그래도 마음이 불안했다. 휴가였던 연말연시에 병원을 알아봤어야 했는데, 집 안에 고양이들이 들어오고 나서 벼룩 때문에 고생을 했던지라 대청소를 하고 난리를 피웠다. 중성화 수술을 시키는 일을 까맣게 잊고 지내가 결국 휴가가 끝나버리고 말았다. 하루하루 햇살이가 밥을 맛있게 먹을 때마다, 배가 유난히 동그랗게 보일 때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러다가 내 마당이 고양이 새끼들로 가득 차 버리게 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커졌다. 햇살이를 동물보호단체에 보내서 입양시키는 건, 아빠와 함께 있기를 바라는 녀석에게는 못할 짓인 것 같아서, 일단 중성화만 시키기로 했다. 중성화만 시키고, 수술 자국이 다 나을 때까지만 집 안에서 돌보다가 다 나으면 다시 방생(?)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아빠인 노을이, 자매인 달빛이와 함께 살 수 있을 테니까. 달빛이도 암컷이라 수술을 시켜야 하는데 이 녀석은 나만 보면 도망을 가서 잡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달빛이 걱정은 일단 햇살이 수술이 끝나고 나서 하기로 했다.

원망의 눈빛이 아니길 바란다

그래서 여기저기 병원을 알아보고 수술비를 비교해보니 대충 250-300불 정도 되는 듯했다. 수술 후에 임신한 것이 발견되면 추가 요금이 100불 정도 있다고 한다. 제발 벌써 임신한 것은 아니길 바라며, 제일 리뷰가 좋은 병원에 예약을 했다. 바로 그다음 날이라도 수술받게 하고 싶었지만, 일주일 후인 오늘에야 예약이 가능했다. 수술은 내일이지만, 병원이 여는 시간에 맞춰서 고양이를 데려다줄 수 없어서 하루 전인 오늘 미리 데려가게 되었다. 수술 전 날 6시 이후부터는 금식을 시켜야 한다고 하는데, 혹시나 햇살이를 납치(?)하는데 실패할까 봐, 밥을 먹으러 온 햇살이가 밥그릇에 머리를 숙이는 순간 잡아서 이동장에 넣어버렸다. 배가 부르면 바로 도망가기 때문에 할 수 없었다. 미안한 마음에 이동장에 밥이랑 물을 넣어줬지만 공포에 질린 햇살이가 먹을 리가 만무. 계속 삐약거리며 우는 녀석을 집에 두고 볼 수가 없어서 바로 병원에 데려갔다.

사료를 넣어주었지만 뭘 먹을 정신이 아니겠지 ㅠㅠ

 

리뷰 별점이 5점 가까이로 굉장히 높은 병원이었는데, 역시나, 친절하고 동물을 사랑하는 마음이 뿜어져 나오는 인자한 수의사님이셨다. 일단 햇살이의 건강을 체크해보니 다행히 임신은 하지 않은 것 같지만 발정기가 가까웠다고 했다. 햇살이를 처음 본 게 8월쯤이었는데 그때가 1개월 째라고 보면 지금이 얼추 7-8개월이 된다. 의사 선생님은 바로 보시고 8개월 정도 됐다고 알아보셔서, 더 신뢰가 갔다. 중성화 수술을 시키면 고양이 귀 끝을 자르지 않냐고 물어보니까 요즘에는 마이크로칩에 수술 여부를 기록한다고 했다. 마이크로 칩을 하겠냐고 물어보는데, 가격을 물어보고, 우물쭈물하다가, 귀를 자르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아서, 하겠다고 했다.

 

 'She's all yours now.
이제 당신 고양이예요'

수의사님의 말 한마디에 정신이 들었다. 마이크로칩에 내 주소와 전화번호가 들어가고 내 이름으로 등록이 되는 것이다. 햇살이는 이제 내 책임이다. 어, 어, 이러려고 데려온 게 아닌데. 새끼 날까 봐 무서워서 수술만 시키려고 한 건데. 입양 보내면 부녀 사이 이산가족을 만드는 것 같아서 그냥 마당에서 밥만 계속 주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되어버렸다. 햇살이를 병원에 두고 나오는데 왈칵 울음이 났다. 오스카를 하늘나라로 보낸 지 2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난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이렇게 또 한 생명을 책임져도 되는 걸까? 오스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 게 가장 컸다. 하지만 오스카 이후 내가 유일하게 뽀뽀를 할 정도로 가까워진 고양이가 햇살이 이고, 햇살이를 지켜줄 인간은 나밖에 없어 보인다. 오스카를 집에 대려올 때는 실 한 오라기만큼의 망설임도 없었다. 아, 얘는 내가 책임져야 되는구나라는 확신이 있어서 데려웠다. 하지만 햇살이는 벌써 7개월 넘게 밥을 주면서 지켜보고만 있었다. 밥을 먹으러 오는 세 마리 고양이 중에서 가장 나를 덜 무서워하긴 하지만 밥만 다 먹으면 도망가버린다. 그런데도 괜찮은 걸까? 얼렁뚱땅 이렇게 집사가 되어버려도 되는걸까? 모르겠다. 앞으로 열흘 동안은 집 안에서 돌보며 수술자국이 회복되기만을 기다려야 한다. 그 사이에 친해질 수 있을까? 이렇게 마음의 준비와 확신없이 집사가 되면 안되는데, 걱정이 앞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