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이라고 생각했다. 몇 년 전 먼 곳으로 떠나보낸 오스카와 너무나 닮아있었다. 경계심과 겁이 많은 성격도 비슷했다. 나만 보면 도망갔지만, 아침저녁으로 꼬박꼬박 밥을 먹으러 왔다. 사람만 보면 도망을 가기에, 다른 누군가가 이 아이를 키우고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새끼 고양이 때부터 몇 달간 밥을 주었지만, 키우겠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 하지만 비 오는 어느 날, 짝짓기를 하려는 아빠 고양이(!) 노을이를 피해서 달아나는 모습을 보고 난 후에야 중성화를 시켜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얘가 또 새끼들을 낳아서 데리고 밥을 먹으로 몰려온다면 사료값도 걱정이지만, 그 새끼들의 거취까지 내가 책임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빠 고양이인 노을이와 함께 밥을 먹으러 오던 두 마리의 새끼 고양이들 중, 나만 보면 갸르릉 거리던 햇살이를 일단 먼저 납치(얘들 입장에서는 범죄행위이다. 미안해 ㅠㅠ) 해서 중성화를 시켰다. 햇살이는 비교적 쉽게 이동장에 넣기도 했고, 세 마리 중, 유일하게 나에게 친밀감을 표시했기 때문에, 동물병원 직원이 마이크로칩과 입양에 대해 물어봤을 때, 비교적 쉽게 결심을 할 수 있었다.
달빛이의 경우는 달랐다. 이동장에 넣는 과정도 치밀한 계획을 한 후에야 실행에 옮길 수 있었다. 맛있는 간식을 준 후, 정신없이 먹고 있을 때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서 재빨리 이동장에 넣고 지퍼를 잠그는 과정은, 생각해보면 순식간에 이루어졌지만, 놓칠까 봐 긴장을 해서인지, 꽤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 사이 달빛이가 발버둥을 쳐서 손도 약간 긁혔다. 중성화 수술을 시키고, 마이크로칩을 삽입하는 수술을 하기 위해 내 인적 사항을 적어서 병원에 건넨 후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이게 과연 잘한 일일까? 수술 후 열흘은 집 안에서 격리를 시켜야 했는데, 밖에 나가고 싶어서 문 앞에만 붙어있고, 화장실이 아닌 집안 구석구석에 볼 일을 봤다. 결국 오일만에 격리를 포기하고 밖에 내보냈다. 다행히 녹는 실로 수술부위를 꿰맨 터라, 다시 병원에 데려가지 않아도 되었다. 격리 중에 나에게 애교란 애교는 다 보여준 햇살이와는 달리, 달빛이와의 거리는 전혀 좁혀지지 않았다. 역시 입양하는 게 아니었어. 달빛이의 동의도 없이, 나만 보면 도망가는 애의 몸에 내 이름을 넣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이미 늦은 일이다. 그리고, 이렇게 애교 없는 고양이를 키울 사람이 또 누가 있을까 싶어서, 그냥 밥이나 주고, 밤에 안전하게 집 안에서 재우기만 하자고 결론을 내렸다.
중성화 수술을 3월에 했으니 이제 거의 반년이 지났다. 달빛이와 나 사이의 거리는 전혀 좁혀지지 않고 있고, 난 그게 서운하다. 마음 한 구석에는 그래도 시간이 흐르면 우리의 관계가 조금은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작은 희망을 품었었나 보다. 신기하게도 아침저녁으로 나의 무료 급식소(라고 쓰고 뒷마당이라고 읽는다)에 단 하루의 결석 없이 출석은 하는 중이다. 하지만, 내가 가까이 가면 줄행랑을 치고, 내가 좀 쓰다듬을라 치면, 몸을 비틀어 빼버린다. 하아, 이 정도면 날 싫어한다고 봐야 하는 걸까? 밥 만 먹으러 오는 거다. 햇살이도 밖에서 날 만나면 쏜살같이 도망가는 건 마찬가지긴 하지만, 집 안에서는 태도가 360도 돌변해서 침대에 같이 눕기도 하고, 내가 앉아 있는 의자에 올라앉기도 한다. 하지만 달빛이는 집 안에서도 철저히 1-2미터의 거리두기를 실천 중이다. 자석의 같은 극이 서로를 밀어내듯, 내가 가까이 가려고 하면 바로 그만큼 거리를 둔다. 달빛이가 사람이었다면 진즉에 포기했다. 날 이렇게 싫어하는데 일 년 동안 매일 아침저녁으로 친해지려고 노력을 할 만큼의 가치가 있는 인간관계가 있을까? 그런데 난 무슨 이유인지 계속 달빛이의 사랑을 갈구하고 있다. 언젠간 나를 보고 도망가지 않는 날이 오지 않을까? 언젠간 내가 부르면 간식이 없어도 내게 와주지 않을까? 언젠간 내가 쓰다듬어주면 갸르릉 거리며 행복해하지 않을까? 지독한 짝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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