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만 주던 달빛이를 납치해서 중성화 수술을 시킨 것이 작년 3월 초였다. 맞나? 기억이 가물가물. 맛있는 사료를 주고 먹느라 정신없을 때 확 잡아서 이동장에 넣었는데, 달빛이가 발버둥을 치다가 내 팔을 좀 심하게 긁은 기억은 확실히 난다. 록다운 중에 밥만 주고 있었는데 아빠로 보이는 고양이가 자꾸 짝짓기를 시도해서 어쩔 수 없이 중성화를 시켜주었다. 그러다가 수의사 선생님의 권유로 마이크로칩 인식표도 등록해서 얼렁뚱땅 우리 집 주소와 내 전화번호로 등록되어 버린 고양이 달빛. 그런데 등록표에는 영어로 Claire Kim이라고 되어있다. 그전 햇살이를 등록할 때 Hassal Kim으로 했다가 발음이 귀찮다는 뜻의 단어인 'hassle'과 비슷한 게 마음에 걸려서 달빛이의 서류는 영어 이름으로 적어 넣었다. 하지만 Claire라고 부른 적은 거의 없고, 달빛이라고 부르고 있다.
밥을 먹을 때면 늘 그르렁 거려서 행복감을 뿜어내던 햇살이와는 반대로, 달빛이는 허겁지겁 밥을 먹기만 할 뿐 절대 친밀감을 보이지 않았다. 밥만 먹고 바로 도망가기 일쑤였고, 마당에서 마주치면 무슨 살인마(?)를 만난 듯 쏜살같이 도망가서 날 서운하게 했다. 중성화 수술을 하고 2주는 집안에서 격리시켜야 한다는데, 달빛이는 일주일 만에 밖에 내보낼 수밖에 없었다. 중성화 수술을 마치고 집에 데려온 후로, 폭풍 애교로 날 놀라게 했던 햇살이와는 달리, 달빛이는 집 안에 있는 것을 너무 힘들어했다. 사방에 똥을 쌌고, 내가 약을 주는 것을 거부했고, 문 앞에서 문을 열어달라고 야옹거렸다. 상처가 아물 때까지는 격리를 시키지 않으면 임신 가능성이 있다고 해서 최대한 길게 집 안에 두려고 했지만, 이 작은 고양이의 자유에 대한 갈망은 생각보다 엄청났다. 다행히 상처가 아물면서 녹는 실로 수술 부위를 꿰매었기 때문에, 다시 병원에 데려가지 않아도 되었다. 솔직히, 달빛이를 다시 이동장에 넣을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아무튼, 수술 이후로도 계속 밥을 주고, 해가 지면 집 안에서 재우려고 노력했지만 쉽지 않았다. 사료로 꼬셔서 집 안에 들어온 사이 문을 닫으려는 내 작전은 번번이 실패했다. 계속 눈치를 보고, 내가 문을 닫으려는 기미를 느끼면 쏜살같이 밖으로 나갔기 때문이다. 동네 고양이들과 밤에 싸우고 다치지는 않을까 걱정되어서 매일밤 꽤 오랜 시간을 달빛이를 꼬셔서 집안에 들어오게 하는데 시간을 보냈다. 실패한 날은 외박을 하기도 했지만, 달빛이는 아침에는 꼭 돌아와 주었다. 내가 좋아서가 아니라, 밥을 먹기 위해서겠지만, 그래도 점점 루틴이 생겨서 저녁에 들어와서 자고 새벽에 밖으로 나가는데 익숙해졌다. 하루하루, 밥을 주고, 이름을 불러주고 만져주었지만 달빛이의 그르릉 소리는 거의 들을 수가 없었다. 얘는 왜 나를 경계할까? 일 년 넘게 매일 밥도 주고 숙소도 제공해 주는 아줌마를 왜 믿지 못할까? 내가 무섭나? 몇 개월이 지난 어느 날 밤, 어두운 거실 소파에서 잠을 자는 달빛이를 쓰다듬어 주었다. 넌 내가 왜 무섭니? 난 너를 이렇게 좋아하는데. 달빛이가 조용히 그르릉 거리기 시작했다. 그 후로는 매일밤 자기 전에 졸려서 잠을 청하는 달빛이가 비몽사몽 하는 틈을 타서, 만져주고, 좋아한다고 말해주었다. 점점 그르릉 소리가 길어지고 조금씩 커졌다. 그 이후였던 것 같다. 부엌에서 요리를 하면 내 다리에 몸을 비비며 사료를 달라고 조르기 시작했다. 내 다리에 스치는 달빛이의 털의 감촉은 정말 비단결같이 부드러워서, 하던 일을 멈추고 냉장로고 가서 달빛이가 좋아하는 습사료를 줄 수밖에 없다. 날씨가 더운 요즘에는 마룻바닥에 편하게 누워있기도 하고, 집 안에 있는 것이 많이 편해 보인다. 마당에서 만나면 아직도 혼비백산 도망가고, 내가 불러도 잘 오지 않는 것은 여전하지만, 우리 사이의 거리는 확실히 좁혀지고 있는 중이다.
이틀 전, 나의 이부자리에 달빛이가 앉아있는 모습을 처음으로 보았다. 햇살이는 매일 아침에 나를 깨우러 와서 내 품 안에서 한참을 있다가 가지만 달빛이는 평소에 내 침실에는 오지 않았기에 깜짝 놀랐다.
드디어 내 냄새가 나는 침구에 앉아도 거부감이 들지 않게 된 것일까? 사실 달빛이는 늘 햇살이가 나에게 와서 얼굴을 비비고 애교를 떠는 모습을 멀리서 보고 있다. 무슨 생각으로 우리의 애정 행각(?)을 지켜보는지 늘 궁금했는데, 조금은 따라 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것 같다.
오늘 아침에는 여느 때처럼 아침에 햇살이가 날 깨우러 왔는데, 내 발치에 달빛이가 웅크리고 있어서 또 한 번 놀랬다. 끝자락이긴 했지만 바닥이 아니라 이불 위에 앉아서 내가 일어나는 걸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작년 8월부터 밥을 주기 시작했으니까 거의 1년 반 만에 반경 1미터 안에 들어와 준 셈이다. 어떤 고양이들은 동거인들과 영원히 거리를 두기도 한다고 해서, 달빛이도 그럴 수도 있겠구나 각오를 하고 있었다. 여기서 더 기대를 하면 욕심일까? 이불을 덮고 누워있는 내 품 안에 달빛이가 쏙 들어와 줄 날을 상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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