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리저튼 시리즈를 포함해서 넷플릭스에 유색인종이 등장하는 평행 우주적 시대극이 많이 눈에 띈다. 흑인과 인도인이 영국 사회에서 백인과 동등하게 대우받는 설정이 처음에는 무척 어색했다. 정치적 옳음을 강요하는 것이 아닌가, 꼭 이래야 하나, 여러 생각이 들었는데, 보면 볼수록 이런 세계관이 참 마음에 든다. 백인만 주야장천 등장하고, 소수의 흑인이 낮은 신분의 역할로 잠깐 스쳐가듯 보이는 시대극은 이제 너무 뻔하고 재미없다. 만약 영국이 노예제도와 식민주의라는 역사적 과오를 범하지 않았다면 그 사회가 어떤 모습이었을지 상상하는 재미가 쏠쏠하고, 간접적으로나마 그들의 역사의 오점을 짚어주는 효과도 있다.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을 포함해서 18-19세기의 영국 복식과 있어 보이는 화법을 좋아하는 나에게 '미스터 말콤스 리스트'는 기분 좋게 일요일 오후를 보내기에 최적인 작품이었다. 주인공이 인도계와 아프리카계인 '오만과 편견'이랄까? 출연진 리스트에서 한국계와 일본계로 보이는 배우이름이 있어서 눈여겨봤는데, 감초 같은 조연을 잘 연기해서 극의 세계관에 잘 녹아들었다.
주인공의 사촌의 미망인 역을 연기한 애슐리 팍의 호들갑 떠는 연기가 일품이었다. 분명 영어가 모국어인 교포일 텐데 왜 한국 아줌마의 오지랖이 느껴졌을까? 나만의 착각이겠지? 몇 번 등장하지 않았는데도 꽤 기억에 남았다.
출처
화장 때문에 처음에는 흑인 혼혈인가 생각이 되었는데, 확실히 동양인이었다. 이름을 보니 일본계이다. 흑인으로 보이는 딸과 너무 다른 외모 때문에 약간 몰입에 방해가 되긴 했지만, 자연스러운 그녀의 연기 때문인지 나중에는 그러려니 하고 보게 되었다. 솔직히 주인공의 엄마가 백인 배우인데 딸이 너무 인도적인 외모인 것도 신경이 쓰였는데, 너무 유전자 법칙에 얽매이는 것도 영화 감상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다. 나 같은 사람들을 위해서 영화 제작자들이 좀 더 과학적으로(?) 캐스팅을 해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긴 하다.
영화의 제목에 들어가는 리스트를 검색해 보았다. (발번역 by me)
Requirements for a Wife by Jeremiah Malcolm
제레마이야 말콤의 부인 자격 조건 리스트
1. Handsome of countenance and figure - 예쁘고 몸매가 좋을 것
2. Graceful & well mannered - 우아하고 교양이 있을 것
3. Educates herself by extensive reading - 폭넓은 독서로 학식이 높을 것
4. Converses in a sensible fashion - 현명하게 대화할 수 있을 것
5. Charitable and altruistic - 남을 잘 돕고, 자기희생적
6. Has genteel relations from good society - 집안이 좋을 것
7. Candid, truthful & guileless - 솔직하고, 진실하며, 순수할 것
8. Possesses musical or artistic talent - 음악이나 미술적 소양이 있음
9. Amiable & even tempered - 붙임성 있고 성격이 원만할 것
10. A forgiving nature - 너그러운 성격
아무리 시대극이라지만 페미니스트들에게 돌팔매질받기에 딱 좋은 리스트이다. 하지만 현대에도 교회에서 배우자 기도라고 해서 목록을 만들고 기도하지 않던가? 나도 그랬었지. 그래서 내가 지금 이 모양...
제인 오스틴 스타일의 시대극 줄거리야 늘 뻔하다. 이 영화도 역시 좋은 결혼 상대를 찾는 과정에서 겪는 우여곡절 후에 언제나 짝을 찾고 행복해지는 줄거리이지만 내게는 살짝 특별하게 느껴졌다. 바로 주인공의 친구로 나오는 질투와 욕망의 화신 '줄리아'때문이다.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고, 이기적이며, 교양 없고, 스스럼없이 남을 이용한다. 자존심은 높은데, 자꾸 연애에는 실패를 하고 그 이유를 모른다. 이런 결점 투성이인 줄리아가 인간적이라서 참 좋았다. 집안 빼고 완벽한 주인공인 셀리나보다는 나와 공통점이 더 많은 줄리아에게 더 연민이 갔다. 배우가 연기가 좋았던 것도 이유인듯하다.
영화 이야기를 이만큼이나 했는데 주인공 이야기를 지금에서야 꺼낸다. 배우도 연기도 다 좋았는데 역할이 너무 뻔해서 아쉬웠다. 처음에는 인종뿐만 아니라 몸매까지 정치적으로 올바름을 추구하기 위해서 일부러 부하게 보이는 드레스를 입은 줄 알았다. 배부분이 너무 둥그스름해서 말이지. 그런데 설마 해서 검색해 보니, 임신 중이었다고 한다. 너무 배가 나오긴 했어.
내가 스토리에 집중을 너무 안 해서 그런지 거슬리는 것만 눈에 들어왔나 보다. 중간에 두 여배우를 착각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한눈에 봐도 키가 다른데 어떻게 모를 수 있는지 안타까웠다. 이런 세심한 설정도 캐스팅 단계에서 좀 신경 써주면 참 좋겠는데, 나 같은 과몰입충을 위해서 말이지.
아프리카 이민 일 세대 같은 외모의 남주인공을 시대극에서 보게 될 줄이야. 목소리도 멋졌고 연기도 잘했다. 중간에 자신의 언어로 결혼에 대한 속담을 이야기하는 부분이 있는데, 영국 시대극에 아프리카 언어를 포함시키는 진귀한 연출이 인상적이었다. 억지스럽지 않아서 좋았음. 그런데 '결혼은 배우자의 가족 전체와 하는 것이다'라는 말, 한국에도 있지 않나? 모든 나라에 있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줄거리가 너무 뻔하다 보니 다른 부분들에 집중해서 영화를 본 것 같다. 의상도 참 훌륭했고, 음악은... 기억이 나질 않네. 하지만 오랜만에 신선한 즐거움을 준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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