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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니멀리즘

[미니멀리즘] 추억상자 정리하기

2013년 말이었던 것 같다. 어느 미니멀리스트 블로그를 보고는 갑자기 정리를 해야겠다는 충동에 사로잡혔다. 한 열개 정도 되는 복사 용지 박스 사이즈의 상자들에다 안 쓰는 물건들을 담고는 침대 밑으로 밀어 넣었다. 6개월 동안 찾지 않는 상자는 그대로 버리라는 게 그 블로그의 조언이었다. 하지만 한 일 년 반이 지나서야 침대 밑 상자 중 조금을 정리했던 것 같다. 더 이상 필요 없는 노트와 오선지를 재활용했던 것 같다. 침대 위치를 바꿀 때마다 먼지 덮인 상자와 마주하는 게 참 고역이었다. 몇 년에 걸쳐 조금씩 정리를 해 나가다가 올해 이사를 오면서 마지막 두 상자를 가져왔다. 하나는 교회 성가대 악보를 모아놓은 것. 하나는 추억 상자였다. 악보들은 언젠가 찬찬히 보면서 한 번씩 연습해봐야지 생각만 했지 그 오랜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치지 않았다. 내가 피아노 앞에서 치고 싶은 곡들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도 왜 버리지 못했을까?

몇 주전 갑자기 또 정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 상자를 열어서 종이를 골라냈다. 스테이플이 찍힌 것들은 뽑아내고, 폴더들은 쓰레기통에 악보는 재활용함에 넣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추억 상자가 남았다. 일단 상자 속 물건들을 다 꺼내 두었다.

 

이 상태로 일주일 이상을 방치했다.

중학교 때 이민을 가면서 시작된 친구들과의 편지들.  생일 축하 카드. 크리스마스 연하장. 가르치던 학생들이 준 카드나 편지. 딱 보기만 해도 왜 버리지 못했는지 알 수가 있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스쳐 지나간 인연들에게 받은 우정 가득한 편지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아쉽게도 지금은 연락하지 않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들도 있었고, 이름을 봐도 누군지 모르겠는 사람들도 몇 되었다.

도저히 정리하고 버릴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일주일이 넘는 시간 동안 잠깐씩 버리기 쉬운 것부터 골라 들었다. 예뻐서 간직했던 달력들, 잡지나 신문기사 오려둔 것들, 왜 가지고 있었는지 의문이 드는 팜플랫과 책자들이 꽤 되었다. 그러다가 편지들을 하나하나 읽으면서 추억에 잠기고 그러다가 도저히 정리가 되지 않아 포기하기를 계속 반복했다.  일주일 넘는 시간 지저분한 상태로 계속 방치하면서 더 이상 이렇게 두어서는 안 되겠다는 위기감이 들었다. 그리고 여러 생각들이 스쳤다. 지금까지 보관만 해두고 읽지도 았았던 추억들이다. 소중하지만, 내가 앞으로 더 가볍게 살아가기 위해서 떠나보내야 한다. 그리고는 어제저녁부터 거의 자정까지 거의 600여 장의 사진을 찍으면서 하나하나 재활용함에 넣는 작업을 완료했다. 못 나와서 처박아두었던 사진들도 몇 장 나왔는데 이제 보니 어릴 때라 그런지 다 괜찮아 보였다. 정리하지 못한 다이어리 속지들도 많이 나왔는데 일기처럼 휘갈긴 메모들 속에 20대의 진한 방황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사진을 찍으면서 내용을 확인하는 사이 추억에 잠기기도 했지만 손동작을 멈추지 않았다. 정리하면서 느낀 점 몇 가지:

 

-친구가 없다고 외롭다고 생각했던 시절마저 나에게 편지를 주고 우정을 표현해준 사람들이 있었다.

-내가 놓쳐버린 인연도 많았었는데 잊고 살았다.

-지금은 연락이 끊어진 친구 C가 너무 보고 싶다. 그 친구의 편지는 진심과 우정이 듬뿍 담긴 보물이었다.

-난 과연 어떤 답장들을 했을까? 너무 애정표현에 인색했던 건 아니었을까?

-내가 보냈던 편지들은 어떤 운명을 맞이했을까? 누군가 아직도 가지고 있다면 싫을 것도 같다.

-많은 인연들이 손가락 사이로 떨어지는 모래알같이 스쳐 지나갔는데 남은 사람은 거의 없구나.

-내가 참 미숙했구나. 그리고 지금도 참 미숙하구나. 그런데 다행히도 전보다는 많이 행복해졌다.

-쓸데없는 욕심으로 발버둥 치며 참 많은 시간을 낭비했구나.

-내가 결국 원했던 건 나 자신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이었구나. 결국 이걸로 귀결되는구나.

 

 

꽤 많은 사진을 사진 파일로만 남기고 다 처분했지만 그중에서 이 한 장만은 도저히 버릴 수가 없었다.

그리운 오스카

이 년 전 먼 곳으로 가버린 오스카가 늠름하게 마당을 활보하는 사진이다. 이 사진도 파일로 남겨두었지만 당분간은 사진으로도 가지고 있고 싶다. 볼 때마다 너무 마음이 아프다면 아쉬워도 버리는 게 맞는 것 같지만, 며칠만 두고 보려고 한다.

 

거의 8년 동안 상자에 갇혀있던 추억들은 이제 600여 장의 사진, 3기가의 파일이 되었다. 이 파일은 또 앞으로 어떻게 정리를 해야 하는 걸까? 앞으로 다시 찾아보기는 하려나? 외장 하드가 고장 나면 같이 사라지는 건가? 이 문제는 8년보다는 짧은 시간 안에 해결을 보려 한다.ㄷ

 

Every clutter is a delayed decision. 지저분함은 결정의 보류라는 뜻인 것 같다. 그때그때 바로 물건의 행방을 결정해주지 않으면 그 미결정의 상태가 쌓이고 커져서 마음의 짐이 되어버린다. 앞으로 난 좀 더 가볍게 살 수 있을까? 좀 더 행복해진 건 확실하다. 뿌듯함과 속 시원함을 오랜만에 느낀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