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고 기다리던 이 주 동안의 방학 중 일주일을 아파서 집에서 보내고 나니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조바심이 나던 참에 지인을 통해서 오페라 티켓을 저렴하게 구입하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 보통 $100 정도나 하는 티켓을 수수료 포함 $45에 구입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단점은 당일 아침 9시에 티켓팅을 해야 하고, 두 장을 동시에 구입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티켓팅도 운이 따라야 하는데, 결국 지인은 티켓팅에 실패하고 나만 성공해서 혼자 보고 오게 되었다. 이게 참, 미안하기도 하고 좀 서먹해진다. 티켓을 샀으니 안 갈 수도 없고, 혼자 가는 것보다는 둘이 가는 게 감상을 나누는 재미가 있는데 말이지. 혹시 이 앱을 사용할 생각이라면 두 장을 동시에 구입할 수 있을 때 가던지 아니면 아예 처음부터 혼자 간다고 생각하고 구입하는 게 마음이 편할 것 같다.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지만 오페라는 보기 시작하면 꾸벅꾸벅 졸게 되어서 크게 관심이 없는 편이었다. 외국어로 불리는 노래들이 내 마음에 와닿지 않아서도 그렇고, 아름다운 아리아만 있는 게 아니라, 단조로운 멜로디에 얹은 대사를 읊조리는 레치타티브 (recitative)가 지루하게 느껴진 점이 큰 것 같았다. 하지만 돈을 냈으면 최대한 즐겨야지! 유튜브에서 다른 오페라 영상을 보고, 해설도 찾아보고, 기본 줄거리와 등장인물의 이름, 관계성, 작곡 배경 등을 열심히 숙지하고 갔다. 다행히 들어본 곡이 한 곡 있어서 음악적으로 약간의 친밀감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나머지 아리아들은 내 취향이 아닌 건지 유명한 곡들이 아닌 건지 들어본 기억이 없었지만 어떡하랴. 유튜브에서 가사 자막이 있는 영상을 틀어놓고 내용을 이해하려고 했지만 또 잠이 들어버렸....
유료 공연을 보는 일이 흔치 않기 때문에 내가 공연을 기다리고 기대하는 자세는 좀 유별난 편이다.
0. 위에 쓴 대로 최대한 작품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서 음악을 미리 듣고 최대한 곡들과 친숙해지기 위해 노력한다. 공연 중에 내가 아는 곡이 나오면 괜히 반갑고 더 좋게 들리기 때문이다. 나만 그런가?
1. 공연을 볼 때 최고의 컨디션을 유지하기 위해서 피곤하지 않도록 그 전날부터 컨디션을 최고로 끌어올린다. 비싼 티켓사서 갔는데 졸면 안 되잖아! 다행히 방학 중이어서 낮잠을 푹 잤다. 잠이 들 때까지 아이다 음악을 들으려고 틀어놨는데 결국 꿀잠을 자고 맨 마지막 관객의 우렁찬 박수 소리에 낮잠에서 깨어났다 -.-;;
2. 마찬가지로 공연을 볼 때 화장실에 자주 갈 수 없기 때문에 물을 적게 마시고 식사도 좀 일찍 해둔다.
3. 공연 시작하기 전에 미리 가서 좌석도 확인하고 차분한 마음으로 책자도 읽는다. 무대 시작 전 오케스트라가 연습하는 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나까지 긴장되고 그 긴장감 덕분에 공연에 대한 기대감이 더 커진다. 이번에는 공연을 너무 기대한 나머지 한 시간이나 일찍 도착해서 오페라 하우스 근처를 산책했다.
7시 30분부터 10시 50분의 공연이라고 티켓에 쓰여있어서 7시 조금 전에 오페라 하우스 계단을 올라갔는데 친절한 경비원 분이 안으로 들어가려면 밑에 출입구가 있다고 알려주셨다. 저렴한 티켓이라서 구석자리 어디쯤이겠지 했는데 다행히 너무 구석은 아니었고, 내 오른쪽으로 한자리가 비어서 비교적 쾌적하게 공연을 즐길 수 있었다. 오른쪽에 지인이 앉았었으면 딱 좋았는데 좀 아쉽긴 했다. 참 공연은 티켓에 쓰인 시간보다 빠른 10시 30분에 끝났다.
결론적으로 공연은 진짜 좋았다! 내가 오페라를 한 번도 졸지 않고 보다니! 이렇게 재밌어서 아직도 오페라를 찾는 관객들이 있구나.
내가 감동받은 점 몇 가지:
- 오케스트라의 소리가 탱글탱글하다고 해야 하나, 선명하면서도 알맹이가 있게 들렸다. 집에 있는 스피터나 컴퓨터, 전화기를 통해 듣는 소리와는 차원이 다르다. 이게 당연한 건데 평소에는 잊고 살았다. 라이브 음악이 무조건 최고다! 현악기 소리도 좋았지만 특히 플루트 소리가 심금을 울렸다. 발코니 자리가 텅 비어있어서 티켓이 안 팔렸나 보다 했는데, 공연 중간에 호른 주자들이 나타나서 연주를 했다. 가까이서 금관악기의 큰 소리를 듣는 것도 유쾌한 경험이었다.
- 중간에 무반주 남성 합창하는 부분이 맘에 들었다. 목소리 좋은 남자들이 떼거지(?)로 모여서 노래를 부르니 좋지 않을 수가 없는데, 베르디의 멜로디가 신비로워서 더 멋졌던 것 같다. 아, 진짜. 좋다, 멋지다 말고 다른 형용사 없나?
- 베르디의 오페라인만큼 이탈리아어로 불리기 때문에 무대 상단에 영어 자막이 있었다. 자막이 빨리 바뀌지 않는 편이라 무대도 보고 자막도 보고 번갈아 시선을 옮겨도 크게 산만하지 않았다. 덕분에 내용을 쉽게 따라갈 수 있었고 늘 단조롭다고 생각했던 레치타티브도 내용을 알고 들으니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 공연 중에 재판을 하는 장면이 있는데, 죄목을 세 번 반복해서 말하는 구간이 의외로 좋았다. 타악기의 효과음도 있고, 비슷한 멜로디를 세 번 연달아 듣는데도 지루하기는커녕 약간의 변주가 어디서 나올지 기대하게 하는 효과가 있었다.
- 주인공은 아이다이지만, 개인적으로 남주인공인 라다메스역의 테너 가수 목소리가 청량하고 좋았다. 마이크를 한 열개는 씹어먹은 듯한 엄청난 성량이면서도 음색은 청량하고 로맨틱했다. 사랑을 노래하는 아리아에서 감정 표현이 풍부해서 나도 반할 뻔했다.
- 중간에 무용수들이 춤을 추는 구간이 몇 번 나오는데, 오페라에서 현대무용도 감상할 수 있다니 1+1 세일 느낌이었다! 표현이 너무 저렴한가? 유튜브에서 본 오래된 영상들 속에서는 발레리나와 발레리노가 나왔는데, 이번 공연에서는 10명의 젊은 여성 무용수들이 현대무용을 선보였다. 좀비를 연상시키는 동작들이 나올 때는 좀 난해하게 느껴졌지만 장면에 어울리는 것도 같았다. 의상이 좀 맘에 걸렸는데 이건 밑에 아쉬운 점에서 자세히 써야지.
- 영화 '귀여운 여인'에서 줄리아 로버트가 연기하는 여주인공이 오페라를 보면서 우는 장면이 나온다. 좋아하는 영화이지만 볼 때마다 그 장면만큼은 억지스러운 설정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아니었다. 오페라를 볼 때마다 졸던 나 같은 사람도 몇 번이나 눈물이 났기 때문이다. 1870년에 초연된 오페라지만 지금도 감정이입이 되는 작품이라니, 이런 걸 걸작이라고 하나보다.
내 눈시울을 적신 장면 세 군데:
1) 새드엔딩이기 때문에 마지막 장면이 슬펐는데, 조용한 현악기의 음색과 절제된 무대 연출이 두 주인공의 비극을 더 극적으로 만들었다. 뭔가 다 허무하고, 두 사람이 불쌍하고, 그런 비극이 과거에도 현재에도 비일비재하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줘서 서글퍼진 것 같다.
2) 아이다가 조국인 에티오피아를 그리워하면서 부르는 아리아에서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 한국이 그리워져서일까? 모국으로 가지 못하고 있는 난민 학생들이 생각나기도 했다. 나의 이민자로서의 마음을 건드리는 무언가가 있었던 것 같다.
3) 아이다와 라다메스가 도망가서 행복하게 사는 미래를 꿈꾸며 부르는 듀엣이 있는데, 두 사람이 그리는 미래가 비현실적으로 행복해서 슬퍼졌다. 둘의 비극적인 운명을 알고 들어서 그렇기도 했고, 그 두 사람도 사실은 그게 헛된 꿈이라는 걸 인지하면서도 부르는 노래라서 가슴이 아팠다.
다른 유튜브 영상에서는 보지 못한 특이한 연출이 눈에 띄었는데, 공연이 시작하자마자 아이다가 등장해서는 아마도 라다메스의 것으로 추정되는 갑옷을 껴안고 흐느끼는 장면이 있다. 좀 뜬금없다고 느꼈는데, 그게 맨 마지막 장면의 연출과 연결되는 듯 보였다. 오페라의 줄거리 상으로는 아이다가 라다메스와 함께 무덤으로 들어가서 같이 죽게 된다는 설정인데, 이번 공연에서는 아이다가 라다메스와 무덤에 같이 있는 게 아니라 아이다의 환영을 본 것이라는 해석을 가능하게 연출을 했다. 라다메스와 아이다가 마지막 듀엣을 부를 때 서로 마주 보지 않고 떨어져서 무대에 섰기 때문이다. 나의 착각인지 아니면 또 다른 해석도 가능한지 궁금했지만, 혼자서 본 공연이라 알 길이 없어서 아쉽다.
여러모로 만족스러운 공연이었지만, 몇 가지 아쉬움도 남았다.
- 무용수들의 의상도 그렇고, 8개의 디지털 패널로 만든 배경화면도 그렇고, 필요이상으로 야했다. 거의 나체 수준의 그래픽과 의상이 거슬렸는데, 아마도 아름다워 보이지 않아서 그런 것 같다. 야해도 고상할 수 있지 않은가? 고상함이나 우아함이 결여된 헐벗음이었다.
- 디지털 패널의 배경 중에 좀 뜬금없다고 느껴지는 그래픽이 몇 가지 있었다. 왜 자꾸 검정 표범이 나오는 거지? 왜 강가에 헐벗은 임산부가 서있지? 말 타는 군인은 왜 한 명뿐인 거지?
- 유튜브에서 본 다른 공연들의 화려함에 비해 다소 소박한 무대장치가 아쉬웠다. 디지털 패널로 무대전환하는 건 좋지만, 의자나, 갑옷, 주요 등장인물의 의상이 이집트 같지 않았다. 아니 왜 파라오가 전신 갑옷을 입고 있냐고!
베르디의 후기 작품들이 철학적이라는 해설이 생각난다. 철학은 모르지만 이 공연을 보고 사랑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절절한 사랑이 아름다워 보이는 것은 그에 비례하는 큰 아픔과 고난이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는 것은 선택인가 의지인가 의문도 생기고, 또 죽음까지 불사하는 사랑의 존재에 대해서도 궁금해졌다. 평범한 나도 경험할 수 있는 것인지, 하지만 경험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리 나쁜 인생인 것 같지도 않고... 평소에 전혀 생각하지 않은 점들을 돌아보게 해 줬다는 점에서 베르디의 '아이다'가 걸작은 걸작인가 보다.
혼자 다녀온 공연이라서 함께 감상을 나눌 대상이 없다는 아쉬움에 길게 글을 써봤다. 다음에 또 오페라를 볼 기회가 있다면 갈 의향이 있다. 단, 다음에는 혼자 말고 꼭 누군가와 같이 가야지. 이러면 영영 못 갈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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