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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

한강 작가의 희랍어 시간 (Greek Lessons) - 줄거리/감상/스포

출처

도서관에서 빌려서 본 영문판

 

한강 작가의 노벨 문학상 수상 소식을 듣고 지역 도서관들의 사이트들에서 그녀의 저서들을 검색해 보았다. 예전에 한국어로 된 '채식주의자'를 빌려서 읽었던 기억이 있었기 때문에 다른 책들도 있으리라 생각했다. 예상대로 여러 권이 있었지만 다 대출 중이었고, 그 후로부터 몇 주가 지나서야 '희랍어 시간'의 영문판을 빌릴 수 있었다. 솔직히 한국어로 된 원작을 읽고 싶었지만 호주까지 배송을 받는 것은 번거롭고 가격도 상당해서 우선 영어로라도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컸다. 사실 '채식주의자'를 읽었을 때는 그 내용이 충격적이라서 제대로 읽지도 못하고 책을 덮었던 기억이 있다. 담겨 있는 메시지를 이해하기도 전에, 너무도 강렬한 이야기들에 마음이 불편했다. 특히 주인공이 채식을 결심하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되었던 잔인한 동물학대의 장면은 읽기에 너무 고통스러웠고 이 작가는 나와는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몇 년이 지나고 몇 달 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는 뉴스와 함께 그녀의 예전 인터뷰들이 인터넷 여기저기에 회자되었는데, 그녀의 말투, 인격, 삶을 대하는 진지한 태도, 타인의 고통을 마주하는 용기, 그녀의 모든 것에 반하고 말았다. 지금까지 나도 모르게 찾고 있었던 사람을 찾은 느낌이었다. 한국과 세계의 종교계, 정치계, 연예계에서 뛰어나다고 언급되는 어느 사람보다, 내가 추구하는 이상적인 인간상에 가까운 사람으로 보였다. 그 이유를 알고 싶어서 그녀의 책들이 다시 읽고 싶어졌다. '희랍어 시간'을 도서관에서 빌려오며, 이 책을 먼저 읽게 되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비교적 다른 책들보다 감정적으로 덜 힘들다는 평을 접했기 때문이다. 시력을 잃어가는 남성과 실어증에 걸린 여성의 이야기라는 간략한 줄거리만 숙지한 채 책을 읽기 시작했다. 여기서부터는 자유로운 감상평 (스포주의):

 

- 영어판으로 읽으면서 내내 한국어로는 어떤 문장들로 쓰여있을지 생각해 보며 읽느라 천천히 단어 하나하나를 곱씹게 되었다. 그래서일까? 주인공들의 감정들이 내 안으로 서서히 스며드는 느낌이었다. 아니, 그 반대로 내가 주인공들의 의식 속으로 풍덩 들어가는 감각도 느꼈다. 시각과 청각의 제약이 있는 그들의 갑갑한 내면세계에 나도 함께 갇혀버린 것 같았다. 흑백의 무성영화 같기도 했고, 소설 중에도 묘사되는 진공의 공간, 혹은 흑암의 공간에 둘러싸인 경험을 했다.

 

- 화자의 시점이 교차되는데 시력을 잃어가는 희랍어 강사는 주로 일인칭으로 서술되는 반면 (가끔 이인칭으로 바뀌기도 하지만), 실어증에 걸린 희랍어 수업의 학생의 부분은 삼인칭으로 되어있다. 처음에는 누가 누구인지 헷갈려서, 청소년기에 독일로 이민을 가는 내용이 나왔을 때는 실어증의 여성이 화자인 줄 알고, 아니 실어증에 걸린 애를 외국으로 보낸다고? 하고 의아해했었다. 그러다가 좀 지나서야, 그 부분이 남성의 시점인 것을 뒤늦게 깨닫고 (오해를 하는 동안에는 난 완전 다른 버전의 소설을 읽고 있었던 셈이다) 다시 그 부분으로 돌아가서 읽어야 했다. 여성이 청소년기에 처음 실어증에 걸렸다가 프랑스어 시간에 말문이 다시 트이는 경험을 했다는 내용이 있어서, 독일에서 학교에 다닐 때 프랑스어를 배웠으리라 짐작을 했던 것이 오해의 원인이었던 것 같다. 독일로 이민을 가기 전에, 한국적인 정서를 잃고 싶지 않았던 화자가 절에서 본 풍경을 기억에 담고, 불교에 대한 서적을 독일로 가져가서 자주 읽었다는 내용이 있었는데, 난 그 장면을 여성이 경험한 것이라고 생각하며 머릿속에 장면들을 펼쳐 나갔던 것이다. 아무튼, 독일로 이민을 간 것은 남성이었고, 독일 학교에서 독일학생들보다 잘했던 과목이 수학과 희랍어여서 대학 전공을 그리스 철학으로 결정하게 된다. 여성은 프랑스어 수업에서 말 문이 트인 이후로 다시 말을 할 수 있게 되다가 성인이 되고 한 참 후 이혼과 어머니의 죽음을 경험하고 다시 말을 잃게 된다. 자신이 몰랐던 프랑스어의 도움으로 말을 되찾았던 경험 때문에 그녀는 또 새로운 언어인 희랍어를 배우면서 다시 말을 할 수 있게 되길 기다려 보지만 같은 기적은 손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 부계 유전의 영향으로 점점 시력을 잃어가는 남성은, 아주 약간 남아있는 시력이 사라지기 전에 한국에 다시 돌아오기로 결심한다. 낯선 언어에 둘러싸여 살던 독일 생활에 지쳐있었기 때문이다. 안경을 써서 수업은 간신히 감당할 수 있지만, 저녁이 되면 일상생활에 큰 지장이 있어서 손전등을 사용해야 할 정도이다. 그런 그의 일상이 묘사되는 부분을 읽으면서, 최근 시력이 많이 나빠진 나 자신의 현실 상황 때문에, 그 불편함과 두려움이 강하게 전달되었다. 책을 편하게 읽을 수도 없고, 말을 못 하는 상대라면 그 표정을 파악할 수 없어서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다. 안경이 떨어져도 줍지 못하고, 밤에는 산책도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 저자의 주된 메시지는 아니겠지만 시력의 소중함을 절실하게 느끼게 되었다.

 

- 2011년에 발간된 '희랍어 시간'에도 동물의 고통이 표현된 장면이 나온다. 분명 작가의 실제 경험에 살을 입힌 것 같은 것이, '채식주의자'에서 나오는 부분과 조금 비슷하기 때문이었다. 이 책에 나오는 수많은 작은 일상의 묘사들 중에 어느 것이 작가의 실제 경험이고 어느 것이 허구일지 상상해 보게 되었다. 작은 동작, 감정들이 너무도 섬세해서, 모든 묘사들이 작가의 실제 경험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만약 이게 맞다면, 한강 작가는 세상을 참 아름답게 느끼고, 매 순간을 소중하게, 슬로 모션으로 사는 사람일 것이다. 그 삶의 방식이 마음에 든다.

 

- 한국에서 산 세월보다 한국을 떠나서 산 세월이 세 배를 넘었는데도, 한국책을 읽을 때는 술술 페이지가 넘어가지만, 영어책은 도저히 진도가 나가질 않는다. 한 때는 한 페이지 읽을 때마다 젤리 하나를 먹는 방식으로 독서 습관을 붙이려는 노력까지 해봤다. 다행히 '희랍어 시간'을 읽을 때는 당분의 도움이 필요하지는 않았지만, 소설의 비교적 짧은 길이에 반해, 3주 이상이라는 꽤 긴 시간에 걸쳐 조금씩 읽어나갔다. 한 번 펼쳐 들었을 때마다 대여섯 페이지 정도밖에 읽지 못했지만, 다행히 책을 덮고 나서도 곧 다시 집어 들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책을 읽고 있지 않았던 그 사이의 시간에도, 이야기의 여운이 내 주위를 감돌았다. 느릿느릿 흘러가는 책 속의 시간, 평온하지만 쓸쓸하게 묘사된 유럽의 풍경, 소리와 빛이 차단된 먹먹한 외로움이, 책 표지에 시선이 닿을 때마다 나를 차분하게 해 준 것 같다.

 

- 한강 작가는 어떻게 이렇게 타인의 아픔을 잘 아는 것일까? 그리고 그 감정들을 글로 옮기는 괴로운 과정을 왜 자처하는 것일까? 내가 글을 쓴다면 그다음에 어떤 흥미로운 일이 일어날지 기대하며 행복한 상상을 하고 싶을 것 같다. 쉽지 않은 현실을 잠시나마 마주하지 않아도 되는, 고통을 줄여주는 마취약 같은 글을 쓰고 싶을 것 같다. 하지만 한강 작가는 일부러 마취를 하지 않고 생살에 바느질을 한다. '채식주의자'와 다른 작품에서는 그 상처가 더 커서 수십 바늘을 꿰매었다면, '희랍어 시간'에서는 다친 상처를 깨끗한 물에 씻고 나서 따가운 소독약을 바르고 호호 불어주는 것 같다. 나와는 차원이 다른 강인함과 용기의 소유자이다. 그래서 닮고 싶은 것일까.

 

-제목이 '희랍어 시간'인 만큼, 언어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게 되는 이야기이다. 이민자로서 외국어를 배우는 과정, 감각이 부자유할 때의 언어소통, 그리고 언어를 뛰어넘는 감정의 소통 등 평소에 무심코 지나치는 점들을 곰곰이 관찰하게 된다. 희랍어 수업시간 중에 문법에 대한 설명이 나오는데, 다양한 언어를 배우는 즐거움도 살짝 엿볼 수 있었다. 언어 배우기를 좋아하는 나로서 공감이 되는 부분이었다.

 

- 책을 반쯤 읽었을 때 문득 깨달았다. 아니, 이야기가 이렇게 진행이 되었는데도 두 사람은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누지 않고 있어! 이러다가 맨 마지막에 한 번 이야기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 아닌가 하는 작은 걱정 (혹은 기대)가 들었다. 다행히 이야기가 끝나기 전에 두 사람이 같은 경험을 공유하게 되어서 대화를 나누는데, 그 대화가 대화라고 할 수 있나, 약간 의구심이 들긴 한다. 내가 소설을 쓰게 되면, 두 사람이 끝까지 대화를 나누지 않거나, 맨 마지막 장에 스치듯 한 마디를 하며 끝나는 이야기를 만들어도 재밌을 것 같다. 그런 이야기, 벌써 있겠지?

 

 

- 책 한 권을 끝내는 게 쉽지 않은 나로서, 이 소설을 휴가가 끝나기 바로 전 다 읽었다는 사실이 너무 뿌듯해서 블로그에 감상평을 남겨본다.

그만큼 흡입력 있고, 힘이 있는 작품이다. 소설 속의 시간에 머무는 동안, 시간이 느린 속도로 흘러가는 느낌, 잠깐 다른 차원에 다녀온 느낌이 들어서 좋았다. 꿈같이 몽롱하게 느껴지기도 했는데 그곳에 조금 더 머물다가 깨어나고 싶다는 아쉬움마저 들었다. 곧 한국어로도 읽어서, 나의 이 감상들이 영어라는 나의 제2외국어에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 차근차근 살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