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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념들

시드니 록다운 일기 - 혼자서 7주간 집콕하며 느낀 점들

어디 보자~ 6월 26일 토요일에 근무를 끝내고 2주간 휴가였는데 갑자기 시드니 지역에 록다운이 시작되었다. 마침 그날이 가족 모임이라 마지막으로 만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 사이에 부모님과 등산을 다녀왔는데 사실 엄밀히 말하면 같이 차를 타고 가는 것도 규칙 위반이었다. 거기다가 몸이 안 좋다는 핑계로 본가에 좀 있다가 집에 갔는데, 나중에 크게 벌을 받게 된다. 부모님이 밀접 접촉자라는 통지가 와서 난 접촉자의 접촉자가 되어버린 것. 그 때문에 백신 예약되었던 것도 다 취소가 된다. ㅠㅠ

 

아무튼 이때 뒤늦은 참회를 하고 철저하게 규칙을 지키기로 결심했다. 그 후에는 자택 근무이기도 해서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만 있는다. 쇼핑도 일주일에 한 번 가다가, 이제는 2주에 한 번, Direct to Boot로 인터넷으로 구매하고 픽업만 하러 간다. 한인 식품점에도 주문을 해놨는데 인기가 많아서 2주째 배송을 기다리는 중이다. 전에는 하루에 한 번 산책이나 조깅을 했었는데 내가 사는 지역에 확진자가 급증한다는 뉴스에 그나마도 그만두었다. 집 안에서 유튜브 보면서 운동하는 걸로 대체. 뒷마당에서 잡초를 뽑고, 쓰레기를 버리러 가는 게 야외활동의 전부다. 아, 화단에 물도 주고 빨래를 널기도 한다. 쌓여있는 나뭇가지들을 정리해서 묶는 작업도 하는 중이다. 다음 주에 집 앞에 내놓으면

 

예상보다 록다운이 길어지면서 이제 이 생활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월요일에서 토요일까지는 재택근무가 있어서 꽤 규칙적인 생활을 해야 한다.

7:30 기상, 온라인 출근 체크 - 하지만 이불 속에서 못 나옴.
8:50 집안 커텐 다 열고 노트북을 켠다. 일 시작.
11:00 -12:00 뉴스로 NSW주 확진자 수 확인. 간단한 점심.
15:15 이 시간이면 일이 안끝나도 노트북을 닫아버린다. 일은 해도 해도 계속 있으니까.
15:15-17:00 팟캐스트나 뉴스 들으면서 요리. 설거지. 화단에 물주기. 놀러오는 이웃 고양이들 밥주기
17:00~ 18:00 뒷마당 잡초 뽑거나, 팟캐스트 들으면서 폰게임. 오후의 마지막 햇살 즐기기.
18:00 ~21:00 온라인으로 장보거나, 인터넷 서핑. 중국어 공부.
21:00 ~23:30 운동/샤워, 손빨래 (세탁기가 없음), 팟캐스트 듣다가 잠.

이렇게 써놓고 보니 인터넷을 참 많이 하고 팟캐스트를 많이 듣는구나. 데일리 리포트를 다시 쓰기 시작해야 하나.

24시간 아무도 만나지 않지만, 일하는 중에 화상통화나 전화통화는 하고 있다. 가끔 조카들과 부모님과 영상통화도 하는데 그것도 초반에는 자주 했다가 이제는 뜸해졌다. 점점 할 말이 없어지는 게 이유인 걸까?

 

외적으로는 외롭고 우울해야 할 조건이지만 지금 내 상황은 꽤 양호하다. 규칙적으로 생활하고, 나름 건강한 채식 식단으로 잘 먹고 있고, 운동도 조금씩이지만 꾸준히 하고 있다. 물론 간혹 아침에 일어나기 정말 힘든 날도 있고, 하루 종일 무기력하거나, 몸이 아파서 잠만 잔 날도 며칠은 있지만 95%는 평균 이상의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다. 과거 우울과 불안 때문에 고생했던 전력이 있어서 이런 내 상태가 좋으면서도 신기하기만 하다.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보니 몇 가지가 떠올랐다.

 

- 매일 운동, 청소, 목욕을 꼭 하려고 했다: 한 가지라도 빼먹으면 다음날에는 꼭 했다. 우울은 수용성이라는 말이 있는데 땀을 내고 몸을 씻는 과정이 우울감을 떨치는데 은근히 중요하다. 운동, 청소, 목욕은 요즘 내 좌우명이 되어버렸다.

- 재택근무의 시작과 끝을 꼭 지키려고 노력했다. 물론 갑자기 오는 전화나 급한 이메일은 응대해야 하지만 웬만하면 노트북을 덮으면

다시 일을 하지 않는다.

- 주변 환경을 깨끗이 한다. 미니멀리스트라서 쉬운 면이 있지만 책상은 신경 쓰지 않으면 어느새 종이 더미로 덮여있다. 왜일까? 아무튼 수시로 점검해서 한눈으로 봐도 좀 휑하다 싶게 해 놔야 기분이 좋다. 또 금방 지저분에 지니까 과하게 깔끔해야 며칠은 봐줄 만 함.

- 식사 시간을 정해놓는다. 간헐적 단식을 하기 때문에 11시에서 저녁 6-7시 전에만 식사를 한다. 그나마 요리다운 요리는 한 끼만 먹는다. 간식을 좋아하지만 먹어도 먹어도 계속 먹고 싶어서 아예 처음부터 참는 게 지방에도 지갑에도 도움이 된다. 주로 인터넷에서 구입을 하기 때문에 결제하기 전에 이성을 되찾고 간식을 최대한 장바구니에서 뺀다. 식사 후에 레몬 티나 홍차를 마시는 습관도 도움이 되는 것 같다. 이제  더 이상 아무것도 안 먹는다는 의식 같은 느낌으로 최대한 천천히 차를 한잔 하는 것이다.

 

여기까지 쓰고 보니, 이런 것은 다 부수적인 요소인 것 같다고 느껴졌다. 그저 난 원래 태생적 집순이라서 이 상황이 괴롭지 않은 것이다. 자전거 타기와 달리기만 빼고 집안에서 하지 못하는 것이 거의 없다 보니, 오히려 인간관계 스트레스가 없는 재택근무가 내게 맞는 것 같다. 일단 가족과 지인들 중에 코로나로 고생하는 사람이 다행히도 없어서 그저 나 자신만 걱정하고 조심하면 되는 감사한 상황이라 이런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일 뿐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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