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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념들

데일리 미니북

추억상자를 몇 년 동안 건드리지도 못하다가 최근에 며칠에 걸쳐서 사진을 찍고 정리해 버렸다. 내가 종이와 추억, 기록에 대한 집착이 있다는 걸 뼈저리게 깨닫는 시간이었다. 아무것도 적어놓지 않으면 정리할 게 없는데, 적고 나면 이상하게 소중해지고 가치가 생긴다. 감정의 배설물 같은 쓸데없는 생각들부터, 꽤 쓸만한 번뜩이는 아이디어, 당장 시도해보고 싶은 새로운 일 등, 기록만 해두고 실천까지 이르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그래서 시작했다. 데일리 미니북.

 

이미지 출처

내 미니북은 이렇게 귀엽진 않다

 

몇 년 전, 동료가 A4용지로 8페이지의 미니북을 만드는 방법을 알려줬을 때, 무슨 이런 기발한 아이디어가 있는지 크게 감동한 적이 있다. 그 후, 메모할 일이 생기면 미니북을 만들어서 필통에 넣고 다니곤 했는데, 최근에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매일 하나의 미니북을 만들어서 그 속에 할 일들과 각종 생각들을 메모해보면 어떨까? 그리고 자기 전 그날의 미니북을 다시 확인해보고 옮겨 적거나 실천을 한 후 그 미니북은 재활용함에 넣는 것이다. 그리고는 다음날의 간단한 계획을 새로운 미니북에 적는 것이다.

 

여백이 많은 날은 생각한 여유가 없었던 날

이면지로 미니북을 만들면 앞 뒤 표지를 포함해서 8페이지가 생긴다. 첫 표지에는 그날의 날짜와 키워드를 적는데. 나름의 주제를 정하는 것. 예를 들어 오랜만에 식료품을 사재기하러 간 날의 주제는 '보충'이라고 잡았다. 모자란 음식도 보충하고, 수면도, 휴식도 좀 보충해보자고 마음을 먹는 것이다. 그다음 페이지에는 생존에 제일 중요한 '의식주'에 대해서 간단히 메모한다. 내일 뭐해먹을 건지 냉장고 속 빨리 소진해야 하는 식재료를 떠올리며 메뉴를 정한다. 손빨래할 것, 청소할 곳에 대해서도 간단히 목표를 정한다. 스쳐 지나가는 번뜩이는 아이디어들을 적는 페이지, 좋은 문구를 발견하면 필사해놓는 여분의 페이지를 비워둔다. 쇼핑 목록이나 그날의 특별한 일정에 대한 메모를 할 때도 있다. 마지막 페이지는 스스로 칭찬과 감사할 것 목록을 메모해 놓는다. 자기 전에 감사일기에 세 가지를 쓰기 시작했는데, 잊지 않도록 기록해 둔다.

 

추억 상자를 비우는데 여러모로 힘들었던 터라, 미니북은 하루의 마지막에 정리해서 재활용함에 넣고 안녕을 고하는 게 원래 목표였는데, 약간의 문제가 생기고 말았다. 바쁘거나, 그날 쓴 메모들을 정리를 못 할 경우 재활용을 하지 못해 계속 쌓여간다는 것이다.

결국 일요일에 몰아서 겨우 정리했다.

미니북 정리라는 게 별거 없을 것 같은데, 또 이게 그렇지 않다. 감사 일기를 쓰고, 좋은 글귀, 스스로 칭찬한 것을 블로그에 정리하고, 실천하고 싶은 새로운 생각들을 정리하는데 꽤 시간이 든다. 아직 체계와 요령이 부족하다. 지금은 록다운 중이라 시간 여유가 많지만, 출근하기 시작하면 시간을 낼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미니북의 장점이 소소하게 있어서 당분간은 계속 시도해 볼 계획이다. 그 장점들이란:

- 그다음 날의 미니북을 전날 준비하는 즐거움이 있다. 내일의 날짜와 주제를 쓰면 새로운 하루에 대한 희망이 생긴다.

- 실천하고 해결한 항목에 가운데 줄을 쫙 긋는 쾌감이 있다. 이렇게!

- 따로 수첩이나 다이어리를 구입하지 않고 이면지를 재활용할 수 있다. 다이어리를 사면 나중에 또 쌓이고 그게 또 스트레스다.

- 필사 강박을 조절할 수 있다. 종이가 작기 때문에 정말 꼭 기록하고 싶은 글귀만 선별하게 된다.

 

이게 시간낭비 일지 아니면 발전된 나로 이어질지는 아직 두고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