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을 한 번에 많이 못 먹는 것을 입이 짧은 것이라고 한다면, 난 '눈'이 굉장히 짧다. 그동안 무수한 애니메이션, 드라마, 영화를 봐서 이젠 뭘 봐도 시큰둥해진 건지, 아니면 그냥 집중력이 점점 짧아져서 그런 건지 모르겠다. 아마 둘 다. 열 작품을 본다면 일곱 작품은 처음 10분 정도에 그만두고, 두 작품은 첫 한 두 편 보다가 말고, 한 작품 정도만 결말 바로 직전에 포기하거나 간신히 끝내는 편이다.
이런 나를, 처음부터 감탄사를 연발하면서 '이게 왜 이렇게 재밌지?'를 계속 질문하게 만든 작품이 바로 디즈니 플러스의 '만달로리안'이다. 아직 시즌 1의 5편을 보는 중인데, 혹시나 또 중간에 포기할까 봐 빨리 써둬야 한다, 이 시리즈의 재미의 이유를 나름 분석한 것을 정리해보려고 한다.
- 스타워즈 시리즈를 건성을 본 나에게도 이해가 되는 단순한 설정이 몰입을 도와주었다. 엉성하게 줄거리를 요약하자면, 헬멧 쓴 현상금 사냥꾼이 스타워즈 세계관에서 돌아다니면서 싸우는 내용이라, 제국이 어떻고, 누가 누구의 숨겨진 아들이고, 그런 것 몰라도 된다. 주인공이 현상금 사냥꾼이다 보니, 서부극 같기도 하고, 사무라이 영화 같기도 하다. 특히 시즌 1의 4편은 쿠로사와 아키라의 '칠 인의 사무라이'가 연상되는 줄거리였다. 오마쥬겠지? 뭐, 재밌으면 됐다.
- 외계인들, 괴수들의 디자인이 참신하다. 다리 달린 물고기 같은 괴물도 나오고, 꼬꼬마 산적(?) 로봇들, 우주선 수리소의 조수 로봇들같이 사랑스러운 씬스틸러들이 매회 등장할 때마다 디자이너들의 상상력에 감탄하게 된다.
- 무엇보다도 매력적인 주인공. 헬멧에 가려져서 얼굴이 안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스포일러에 의하면 딱 한 번 맨얼굴이 나온다고 함) 목소리가 멋있으니 다 멋져 보인다. 거기다가 로보캅 같은 전신 무장 갑옷도 세련되고 또 싸움은 세계관에서 손꼽히게 잘한다. 선과 악의 기준이 애해 모호한 것도 매력 포인트. 자기를 도와준 안드로이드는 배신해도, 귀여운 아기를 구하기 위해선 몇십 명도 쏴버린다. 예측불가의 주인공이, 서부극과 액션 영화의 클리세로 범벅이 된 뻔한 설정과 조화를 이룬다.
- 영화 예산이 천문학적인 숫자라고 얼핏 들었는데, 그걸 알고 봐서 그런지, 액션과 CG가 깔끔하고 세련되게 보인다. 그러면서도 여백의 미가 공존해서 너무 정신없지 않다. 사막과 우주라서 베이지와 검정이 주된 배경색인데, 약간 오래된 흑백 서부극이나 일본 사무라이 영화를 보는 느낌도 난다.
-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요다같이 생긴 아기! 스타워즈 시리즈도 R2-D2나 츄바카 같은 사랑스러운 (?) 등장인물들이 극의 분위기를 밝게 해 주는데, 만달로리안에서는 이 아이가 그 역할을 담당한다. 차가운 현상금 사냥꾼이 육아를 한다는 설정이 의외면서도, 주인공이 서서히 인간미를 회복하는 과정과 맞물려서 재미에 감동을 더한다. 하지만 육아를 너무 쉽게 표현하는 것 같아서 살짝 아쉽다. 기저귀 갈고, 우유 먹이고 이런 귀찮은 장면이 하나도 안 나온다. 이 아기는 50년 동안 도대체 어떻게 살아남은 거지? 배설은 기체로 해버리나? 그럼 냄새는? 밥은 개구리만 가끔 먹으면 되는 건가? 그냥, 같이 데리고 다니며 지켜줄 뿐이다. 사실, 목숨을 걸고 지켜주는 것보다 더 대단한 육아는 없긴 하다. 처음에는 자신의 신분을 위협당하면서까지 아기를 지켜주는 주인공의 행동이 설득력이 없게 느껴졌는데, 나중에 그의 힘들었던 어린 시절이 회상씬에서 나오는 걸 보고, 좀 이해가 되었다. 비록 난 가족과 헤어졌지만, 이 아이만은 내가 홀로 두지 않으리! 이런 결심을 한 듯.
- 매력적인 조연들도 빠뜨릴 수 없다. 스쳐 지나가는 단역들과 심지어 악역들도 개성이 있다. 대사가 짧더라도 유머러스해서 기억에 남는다. 극 초반에 주인공을 도와주는 착한 외계인 아저씨가 나오는데, 자신이 말한 대로 행동하겠다는 의미로 '난 말 다했다 (I have spoken)'이라고 대화를 마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근데 한글 번역은 '내 말을 믿어'로 나옴. 의미는 비슷한데, 그렇게 다정한 뉘앙스는 아니라고. 이 아저씨는 자신의 정의감과 원칙대로 행동하는 츤데레라서 말은 좀 냉정하게 하고 뒤에서 다 도와주는 스타일이란 말이야. 스타워즈에서도 요다가 자신만의 독특한 문법을 사용하고, 'May the Force be with you'라는 인사가 반복되는데, 이 작품에서도 비슷한 작법이 사용된다. 세계관을 더 확고하게 하는 이런 작은 디테일들이 너무 좋다.
계속 이렇게 재밌다면 이대로 시즌 2까지 정주행 해버릴 것 같다. 한 편씩 남아있는 회차가 줄어드는 것이 아까운 기분은 정말 오랜만이다. 이제 포스팅했으니 6편 보러 가야지.
후기:
시즌 2까지 정주행하고 포스팅 또 함. 만달로리안, 왜 이렇게 재밌지? 2
'관심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박한 정리2 절박한 정리 (2022) 1-9회 요점만 정리 (0) | 2022.10.26 |
---|---|
[디즈니 플러스] 만달로리안 - 왜 이렇게 재밌지? (2) (0) | 2022.10.09 |
[호주] Parkrun 토요일 오전 달리기 커뮤니티 (0) | 2022.10.01 |
프로젝트 50 (2022년 100일 남음!) (1) | 2022.09.23 |
[중국어] 배움의 재미는 어디서 오는가? (1) | 2022.09.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