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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드니

호주 MCA 미술관 - 서도호 개인전 2022.11 - 2023.2

오페라 하우스 맞은편에 자리한 Museum of Contemporary Art (현대미술 박물관, 이하 MCA)에서 열리고 있는 한국인 미술가 서도호 개인전에 다녀왔다. 전시회 관계자인 지인이 알려주지 않았다면 몰랐을 전시회였는데, 그녀의 열정적인 설명을 듣고 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국인 도슨트의 가이드 투어도 있다고 해서 서도호 작가의 개인 약력을 아주 약간 검색한 것 이외에는 무지한 상태로 전시회를 찾았다.

 

MCA에서 매년 열리는 국제 미술 시리즈의 올해의 주인공 서도호 작가
싱글 엔트리 온리 - 한 번 나오면 다시 못들어간다는 주의사항을 누차 들음. 티켓은 22불
한국인 남성 아티스트에게 군대란?

 

미술관의 3층에서 시작한 한국어 가이드 투어는 그의 초기 작품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했다. 서울대 미대 교수였던 아버지 밑에서 꽤 유복한 유년시절을 보내고 장기간 미국 유학을 한 작가의 인생이 잘 드러나있는 작품들이었다. 한국 미술계의 초대형 금수저인 셈인데도 그리 거부감이 느껴지거나 하진 않았는데, 아마도 아버지의 거대한 그림자를 벗어나려는 고뇌가 느껴져서인 것 같다.

 

제목: 블루 프린트

한국인 도슨트의 설명이 너무 재미있어서 작품 사진을 찍는 것을 잊어버릴 정도였다. 실을 이용한 작품들도 좋았는데 펜슬 스케치같이 섬세하고 운동감이 있어서 저절로 감탄사가 나왔다. 개인 소장품들이 많았는데 저런 작품을 집에서 걸어놓고 보면 어떤 느낌일까 부러움 섞인 상상을 해보았다.

 

군중과 민주주의를 표현한 작품들도 몇 점 있었다

 

작품마다 엄청난 노동의 시간이 느껴졌다

서도호 작가의 작품들은 언뜻 보면 깔끔하고 단순하게 보이는데 사실 가까이 들여다보면 엄청난 수작업으로 이루어진 것들이 많았다. 아무나 할 수 없는, 확고한 방향성과 계획, 그리고 실천력을 요하는 제작 과정이었다. 이걸 어떻게 다 했지? 군번표 3000개에 하나하나 표식을 세겨넣는다던지, 작은 피겨를 몇천 혹은 몇만 개를 만든다던지, 돈도 돈이고 들인 시간도 엄청났겠지만, 가장 놀라웠던 것은 그것들을 다 보관하고 정리하며, 전시회마다 재조립할 수 있도록 설명해놓는 계획성이었다. 작가의 MBTI는 무조건 J로 끝난다고 확신한다

 

벌집 모양의 벽지가 사실은 고등학교 졸업앨범!

어떤 미술가들은 나 같은 사람은 범접할 수도 없는 뛰어난 그림실력이나 특이한 상상력으로 그들만의 작품세계를 구축하는데, 서도호 작가의 가장 큰 재능은 기획력, 실천력, 그리고 정리력인 것 같다. 그렇다고 그가 그림 실력이 없다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그의 작품들에서 느꼈던 위대함은 몇 년간의 엄청난 노동과 자본의 투자, 그리고 정리와 보관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한 작품 한 작품 보면서 '아니 이걸 어떻게?'라는 의문이 끊이지 않았다. 예술가의 개성이 고유한 그림체나 주제의식만이 아니라 성격적인 특징일 수도 있다는,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새삼스레 깨닫게 됐다. 수년간의 반복 작업과 집중 혹은 집착으로 응고된 작품 하나하나가 작가의 인생의 한 조각, 몇 년간의 수명, 심지어 그의 생살 한 조각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최근 그의 작품들의 일관된 주제는 '집'이다

서울대 대학교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다시 미국에서 학사와 석사를 마친 서도호 작가는 오랜 유학생활 동안 느꼈던 이질감, 그리고 머물렀던 장소들에 대한 애정을 그의 작품세계로 끌어들였다. 자신이 기거했던 집들의 일부분을 천으로 재구성해서 '집'이라는 것이 고정된 공간이 아닌, 천처럼 접어서 가지고 다닐 수 있는, 자신 안에 내재된 기억 혹은 정체성의 일부분이라는 점을 표현해낸다.

 

오래 줄을 서서 들어가 보게 된 '허브'라는 작품의 내부

한국이나 미국에서 열린 전시회에 비해서는 작은 규모라고 하는데, 5개의 방으로 구성된 '허브'라는 작품도 인상적이었다. 파스텔 톤의 다섯 가지의 공간이 연결된 텐트 같은 작품인데, 각기 다른 장소를 하나의 통로처럼 연결해서, 관람객이 그 안을 걸어서 지나갈 수 있는 구조로 되어있었다. 처음 들어간 곳은 서울인데 중간은 런던이 되고 또 나올 때는 미국이 되는, 시공간을 초월하는 타임머신이라고나 할까? 발상도 특이하지만, 나의 감탄을 자아낸 것은, 엄청난 수고로 만들어졌진 작품의 섬세함이었다. 이게 바느질로 가능하다는 것도 미처 상상해보지 못한, 문에 달린 장식들, 소화전, 스위치가 신기하게 형태를 갖춰져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가는 철사를 넣어서 제작했다는데, 육안으로는 철사가 보이지 않게 꼼꼼히 제작되어 있었다. 그 밖에도 천으로 된 계단, 변기 등 일상적인 소품들도 있었는데, 소재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일상이 이렇게 특별해질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MCA의 일층에 전시된 작품 - 그의 본가의 실제크기 모형이다

 

한국인 도슨트 분의 설명을 들으며 전시회장을 돌다가 마지막으로 1층에 전시된 그의 작품을 보게 되었다. 2층의 발코니에서 내려다 수 있었는데 깜짝 놀라고 말았다. 실제 크기의 한옥이 떡하게 지어져 있는 것이었다. 제작과정이 담긴 영상을 작품 옆에서 볼 수 있었는데, 무려 9년간 한지를 집에 직접 붙여서 탁본을 하고 그 종이 조각들을 떼어내서 재구성한 것이라고 한다. 도슨트 분의 설명이 없었다면 몰랐을 부분인데, 몇 백개의 나무 상자에 조각조각 운송되었다고 한다.,시드니에서 50여 명의 인원이 재조립을 했는데 전시회의 일정이 미뤄질 정도로 방대한 작업이었다고 했다. 아니, 어떻게 몇 백장, 몇 천장의 종이를 보관했다가, 그것들을 3D로 재조립할 수 있지? 설명서를 어떻게 쓴 거지? 종이 뒤에다 번호를 쓴다고 해도, 문고리나 기왓장같이 접혀서 형태가 잡혀야 하는 부분들은 어떻게 한 거지? 종이가 한 장이라도 없어지거나 파손된다면? 이런 제작과정을 몰랐다면, 펜슬 스케치로 판지를 붙였거나, 나무로 조각했겠거니 지레짐작했을 정도로, 그림 같은 조형물이었다. 좀 떨어져서 보면 당장 문을 열고 만화 주인공이 걸어 나올 것 같은, 묘하게 현실감이 없는 작품이지만 내 눈앞에 떡 하게 자리를 차지한 건물을 마주하고 있자니 정신이 아득해졌다. 아니 이걸 어떻게 9년간 한국 방문을 할 때마다 수시로 한지를 붙여서 흑연으로 문질러서 만들 생각을 한 것일까? 작가의 인생을 갈아 넣었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다. 자신이 유년시절을 보낸 집에 대한 애착도 느껴지고, 그 기억을, 그 장소를 어떻게든 소유하고 기억하고 말겠다는 집요함도 느껴졌다. 광기 어린 애정이 있지 않고서야 탄생할 수 없는 작품이다.

 

가까이서 보면 압도되는 존재감 - 직접 보길 추천한다

 

자전적인 요소들이 포함된 작품들이 많아서 그런지, 작가의 인생 그 자체가 전시됐다고 봐도 될 것 같다. 그의 일상 대부분이 무언가를 기획하고 제작하는 시간이라고 생각하니, 나도 그런 인생을 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반복되는 일상, 단순한 노동이 모여서 하나의 작품이 되어가는 삶이라면 하루하루가 얼마나 더 의미 있어질까? 내 인생도 작품이 될 수 있을까? 나의 일상의 순간들과 작은 노력들을 모아 모아서 하나의 형태로 만들어 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내가 만에 하나 아티스트가 된다면, 서도호 작가의 전시회가 계기였다고 말해야지. 작품도 만들기 전에 되기 전에 인터뷰할 생각부터 하다니 시작부터 글러먹은 듯  여러가지 면에서 나의 의식 속에 큰 파문을 일으킨 뜻깊은 전시회였다. 최근에 행복의 요소를 목록으로 작성했었는데, 미술관 방문도 추가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