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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

[영화] 꽃다발같은 사랑을 했다 (약스포주의)

온라인 일본 영화제가 드디어 시작했다. 세계 27개국에 한정해서 무료 계정을 만들기만 하면 십 여편의 영화를 무료로 감상할 수 있는데, 한국은 이미 일본 영화가 꽤 인기가 있어서인지 포함되어 있지 않다. 2024년 6월 5일부터 7월 3일 한 달간 영화가 공개되는데, 60년대 작품부터 꽤 최근작품까지 다양한 장르의 라인업이다. 최근 일본 대중문화에 대한 개인적인 열정이 많이 사그라져있어서인지 딱히 보고 싶은 작품은 딱히 없었는데, 그중 '꽃다발 같은 사랑을 했다'라는 제목이 눈에 띄었다. 개봉했을 때 리뷰가 좋았던 기억이 나서, 무난한 청춘 로맨스 작품이겠거니 하고 보기 시작했는데, 점점 빠져들었다.

출처

상큼 풋풋 첫사랑의 기운이 물씬한 포스터

 

영화가 끝나고 엔딩롤이 올라가는데 익숙한 이름이 시야에 들어왔다. 각본이 무려 사카모토 유지! 내가 좋아하는 '그래도 살아간다', '최고의 이혼', '콰르텟'등의 일드를 집필한 그 작가이다. 그래서 내 취향에 꼭 맞았구나. 집에서 영화를 보면 딴짓을 하기 일쑤인 편인데, 이 영화는 (고양이가 보채서 몇 번 자리를 뜬 것 빼고) 끝까지 몰두할 수 있었다. 내가 이 영화에 빠져들었던 이유 몇 가지:

 

- 소소한 일상의 순간들, 그 소중함과 불편함, 아쉬움과 무력감등을 섬세하고 현실적으로 표현한다.

- 그런 현실적인 일상을 그리면서도 그 주인공들은 매력적으로 남겨두어서 보는 재미도 있다.

- 연애의 감정이 탄생하는 순간을 숨 막히도록 애틋하게 보여줬다. 보는 내가 더 떨렸어. 또 두 사람이 쌓아가는 추억들이 놀랍도록 평범하면서도 특별해서 감정이입이 되었다.

- 청춘의 열정이 현실과 생활고에 사그라들면서 타협되는 과정에 감정이입이 되었다. 또르르.

- 남녀 주인공 둘 다 나쁜 사람이 아니고, 둘 다의 입장이 이해가 간다.

- 둘의 공통점이 기가 막히게 많은데, 공통점만으로는 사랑이 유지되지 않는다는 현실을 잘 보여준다.

- 일본의 풍경, 집안의 인테리어, 주인공들의 의상 등이 튀지 않고 조화를 잘 이루어서 화면이 참 예뻤다. 개인적으로 일본에서 살던 시절의 기억이 떠올라서 친근감을 느꼈다.

- 남자 주인공이 '청춘'과 '사회인'을 참 잘 연기했다. 영화 속에서 4년의 시간이 흐르는데 약간 긴 머리에서 짧은 머리로 스타일만 바꾼 게 아니라 순수한 눈빛의 대학생에서 피곤에 찌든 표정과 현실에 완전히 타협한 사회인으로 자연스럽게 변신했다.

- 남자 주인공이 그리는 삽화가 극 중에 잠깐씩 나오고, 마지막 엔딩롤에 나오는데 꽤 느낌이 좋다. 실제 작가가 누구였는지 궁금.

- 귀여운 검은 고양이가 나온다. 일본에서 고양이가 나오는 영화는 흥행한다는 공식이 있다던데 그래서 넣었나 싶게 비중이 그리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잠깐잠깐 나올 때마다 좋았다.

- 작가가 소소한 떡밥 회수를 잘한다. 둘 만의 추억을 생각지도 못 한 곳에서 재등장시키는 등 이야기가 촘촘히 설계되어 있는 점이 좋았다.

- 일본 문화에 익숙하지 못한 관객이라면 놓쳤을 상징들이 몇 가지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신발의 방향이었다. 처음 두 사람이 같은 브랜드의 신발을 나란히 벗어놓았을 때는 집안에 들어가는 방향으로 놓여 있다. 그러다가 나중에 둘이 사회인이 되고 마음이 멀어지고 있을 때의 두 사람의 신발은 다른 브랜드였고 방향은 집 밖으로 나가는 방향으로 놓여 있다. 단순히 두 사람의 신발의 모양이 달라졌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그 들의 마음의 거리를 나타내는 것뿐만 아니라 집 밖을 나갈 때를 대비해서 신발을 벗고 방향을 틀어놓는 '어른'이 되었다는 것을 상징한다. 신발을 나갈 때 편하게 벗어 놓는 것이 일본의 사람들의 습관이기도 하고, 또 둘이 헤어지고 그 집을 나갈 것이라는 복선도 되는 것 같다.

- 꽃다발 같은 사랑은 어떤 사랑일까? 풍성하고 가슴 벅차게 아름답게 일상을 채워준다. 하지만 길지 않은 시간 내에 시들고 만다. 물론 서글픈 사실이지만 이것보다 덜 예쁘고 초라하고 기억에 남지 않는 연애도 많다. 영화의 마지막에도 나오지만 예쁜 사랑의 경험을 했다는 게 인생의 보물이 되어주기도 한다.

 

 

오랜만에 만족스러운 일본 영화를 보았다. 사카모토 유지의 각본의 힘인 걸까? 영상, 각본, 연기, 촬영의 합이 좋았던 작품이라고 생각된다. 한 연애의 탄생과 끝을 전부 지켜본 후에 미소가 지어지고 마음이 따뜻해질 줄은 몰랐다. 이런 반전 환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