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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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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 짝사랑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몇 년 전 먼 곳으로 떠나보낸 오스카와 너무나 닮아있었다. 경계심과 겁이 많은 성격도 비슷했다. 나만 보면 도망갔지만, 아침저녁으로 꼬박꼬박 밥을 먹으러 왔다. 사람만 보면 도망을 가기에, 다른 누군가가 이 아이를 키우고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새끼 고양이 때부터 몇 달간 밥을 주었지만, 키우겠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 하지만 비 오는 어느 날, 짝짓기를 하려는 아빠 고양이(!) 노을이를 피해서 달아나는 모습을 보고 난 후에야 중성화를 시켜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얘가 또 새끼들을 낳아서 데리고 밥을 먹으로 몰려온다면 사료값도 걱정이지만, 그 새끼들의 거취까지 내가 책임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빠 고양이인 노을이와 함께 밥을 먹으러 오던 두 마리의 새끼 고양이들 중, 나만 ..
그렇게 집사가 된다 입이 짧아서 잘 먹지 않던 햇살이가 요새 부쩍 식성이 좋아졌다. 빼빼 말랐던 녀석이 꽤 통통해졌다. 혹시 임신?? 아빠인 노을이와 늘 붙어 다니니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노을이가 짝짓기를 시도할 때마다 혼내서 그런지 최근에 내 앞에서 짝짓기를 시도하는 모습은 본 적이 없긴 했지만, 그래도 마음이 불안했다. 휴가였던 연말연시에 병원을 알아봤어야 했는데, 집 안에 고양이들이 들어오고 나서 벼룩 때문에 고생을 했던지라 대청소를 하고 난리를 피웠다. 중성화 수술을 시키는 일을 까맣게 잊고 지내가 결국 휴가가 끝나버리고 말았다. 하루하루 햇살이가 밥을 맛있게 먹을 때마다, 배가 유난히 동그랗게 보일 때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러다가 내 마당이 고양이 새끼들로 가득 차 버리게 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커졌다..
노을, 햇살, 달빛과 함께 하는 여름 방학 여름 방학이 시작되었지만 마냥 늦잠을 잘 수는 없다. 새벽 5시부터 뒷문에 앉아서 밥을 기다리는 고양이들 때문이다. 방학이지만 코로나 때문에 집에만 있는 요즘이라 고양이의 루틴을 관찰할 기회가 많아졌다. 밥을 먹고 점심때까지 사라졌다가 다시 밥을 먹으러 온다. 해가 지기 전에는 잔디에서 누워있거나 뒷 문 앞에 앉아서 햇볕을 즐긴다. 저녁을 먹고 해가 지면 어딜 가나 했는데, 담장을 타고 뒷 집에 가는 모습을 두 번이나 보았다. 그래, 얘네는 길고양이가 아니야. 한시름 덜었나 했는데 햇살이가 요 며칠 밤이 되어서 뒷문 앞에서 식빵을 굽고 있다. 이렇게 귀여운 새끼 고양이가 밤 10시가 돼도 집에 안 오는데 걱정을 안 하는 집사가 있을까? 나라면 다시는 밤에 못 나가도록 집안에 들여놓고 문을 닫을 텐데. 햇..
집에서 잠은 자지만 키우는 고양이는 아닙니다. 요즘 새벽 5시 반 정도에 눈을 뜨면 벌떡 일어난다. 오늘도 고양이들이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까? 꽤 쌀쌀하지만 이불을 박차고 뒷문으로 향하면, 문 앞에 옹기종기 앉아있는 세 마리의 고양이들이 보인다. 얼른 사료를 주고, 물을 갈아준다. 챱챱챱... 정신없이 밥 먹는 소리를 잠시 듣다가 생각에 잠긴다. 얘네는 내가 일어날 시간을 어떻게 아는 거지? 올 때까지 기다리는 건가? 아니면 집 밑에서 잠자다가 내 발걸음을 듣고 얼른 뒷 문으로 뛰어오는 건가? 가끔은 두 마리나 한 마리만 날 기다릴 때도 있다. 그럴 때면 얘네들이 따로 집이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결석한 그다음 날은 어김없이 다시 찾아와서 며칠 굶은 것처럼 정신없이 밥을 먹는다. 출석률이 제일 좋은 건 검은색 턱시도에 콧수염이 있고, 하얀..
햇살 (2) - 비오는 밤의 숨숨집 미니멀 라이프 카페에서 안 입는 스웨터를 상자에 입혀서 고양이 숨숨집을 만드는 법을 보았다. 마침 안 입는 스웨터가 있어서 박스 위에 입히고 박스 안에는 안 쓰는 수건을 넣어두었다. 전에도 상자가 생기면 고양이 밥그릇 옆에 놓아둔 적이 있었는데, 고양이들은 별로 관심이 없는 듯했다. 그래서 별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그냥 거기에 두기로 했다. 그날 밤, 오랜만에 비가 세차게 내리고 꽤 추워졌다. 혹시나 해서 숨숨집을 들여다보니! 이러고 보니 햇살이가 길고양이라는 심증이 더 굳어지고 있다. 설령 있다고 해도, 이런 비가 많이 오는 밤에, 고양이를 집 안에 들이지 않는 집사라면, 이건 방임이지. 노을이와 달빛이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조그만 햇살이 혼자 추운 밤을 숨숨집에서 보내는 걸 보니 마음이 좋지 않아서..
햇살 (1) - 너는 내가 지켜줄게 햇살이가 노을이를 따라 우리 집 급식소에 매일 발도장을 찍은 지도 꽤 많은 시간이 지났다. 여전히 나만 보면 줄행랑을 치고, 어느 날은 급한 마음에 계단 맨 위에서 뛰어내리기도 했다. 내가 문을 열어 놓은 날 햇살이가 들어와 집안을 구경하다가, 나를 보고는 도망을 간다는 게 유리문에 정면으로 부딪힌 적도 있다. 부딪히는 소리가 꽤 컸는데도 멈추지 않고 밖으로 나가버려서 마음이 좋지 않았다. 내가 왜 이리 무서운 건지, 아직도 날 믿지 못하는 건가? ''아줌마, 무서운 사람 아니야. 그냥 너 예뻐서 밥 주는 거야.'' 아무리 말을 해줘도 알아들을 턱이 없으니, 이거 어떻게 해야 조금은 친해질 수 있을까? 하지만 아주 조금은 햇살이가 우리 집을 편하게 느끼기 시작한 것 같다. 밥을 먹고 혼자서 구석에 놓인 ..
노을 (7) - 반전 햇살이와 달빛이는 영양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아서 개월 수를 짐작하기 힘들다. 아마도 크기에 비해서 개월 수가 많을 같다. 어쩌면 4-5개월? 그렇다면 어미가 또 새끼를 낳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는 의미이다. 노을이의 배는 꽤 불룩해 보이고, 여전히 밥도 많이 먹는다. 내가 밥을 주고 있긴 하지만, 노을이가 꽤 깔끔한 상태인 걸 보면 주인이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비록 만진 적도 없고, 내게 살갑게 다가오지는 않지만, 나를 어느 정도 신뢰하고 있기는 한 것 같다. 내가 자신을 해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정도는 있지 않을까? 최근 들어서 밥을 먹으러 오는 노을이가 나만 보면 계단 위에서 뒹굴며 배를 보여주기 시작했다. 계단 위에서 뒹굴면 밑으로 떨어지기도 하는데 그 모습이 우스우면서도 귀엽다. 나한..
노을 (6) - 고양이가 있는 풍경... 그리고 이제 노을이와 새끼 고양이들은 하루도 빠짐없이 우리 집 무료 급식소를 찾는다. 노을이 지는 저녁때에 주로 방문하던 노을이는 내가 재택근무하는 생활 패턴을 알아챈 건지 이제는 아침과 점심에, 수시로 밥을 먹으러 온다. 노을이가 제일 많이 오고, 가끔은 새끼 고양이들을 데려오는데, 햇살이를 주로 데리고 다닌다. 달빛이는 가끔 저녁때, 노을이와 햇살이가 밥을 먹고 있으면 뒤늦게 합류하는 편이다. 밥을 다 먹고 배가 부르면 고양이들이 가끔 뒷마당에 머물면서 놀다가기도 한다. 전신을 핥으며 그루밍을 하거나, 텃밭에서 볼일을 보고 (이건 싫다 ㅠㅠ), 잡기 놀이를 하며 놀기도 한다. 한가로이 시간을 보내는 고양이들을 보는 것만으로 마음에 큰 위안이 된다. 긴 록다운 중 외롭다는 생각이 거의 들지 않는 건 얘네들 덕..
노을 (5) - 햇살과 달빛 노을이가 데려온 새끼 고양이는 노을이를 닮아서 아주 경계심이 많았다. 이제는 사회적 거리두기의 반경이 2미터에서 1.5미터 정도로 줄어든 노을이에 비해, 새끼 고양이는 나와 눈만 마주쳐도 화들짝 놀라서 계단 밑으로 총알같이 사라졌다. 하도 도망을 많이 가서 운동량이 너무 많은 건 아닌지 걱정이 될 정도. 하지만 노을이가 곁에 있으면 안심이 되는지 집 안 구경도 하고 밥도 잘 먹었다. 내가 없는 편이 맘 놓고 밥을 먹는 것 같아서 몇 번 자리를 비켜줬지만 , 계속 이러다간 영영 친해질 수 없을 것 같아서 내 얼굴을 자주 보여주기로 했다. 내가 자신을 해하지 않는 존재라는 걸 인식시켜주고 싶었다. 새끼 고양이는 노을이에 비교해서 확연히 길고양이 티가 났다. 노을이는 이웃에 주인이 있지 않을까 싶게 꽤 깔끔한..
노을 (4) - 나를 따라와 봐 엄마, 아빠께 전화로 노을이 이야기를 했다. 밥을 엄청 잘 먹는다는 말에 엄마가 임신한 게 아니냐며 걱정하신다. 헉, 그 생각을 못했네. 우리 집에 새끼를 낳으면 어떡하지? 내가 다 키울 수 없는데, 나보고 키워달라고 놓고 가면? 이런 생각을 하며 노을이를 보니 유난히 배가 불룩하게 보였다. 사료를 다 먹으면 그릇을 다시 채워주는데, 다 먹고 돌아갈 때까지 네댓 번 리필을 해주면서 노을이가 임신을 했다는 추측이 점점 확신으로 변해갔다. 그러던 어느 날, 밥을 다 먹고 난 노을이가 나에게 갑자기 '야옹'하며 말을 걸어왔다. '응? 왜 그래?' 내가 대답하자 노을이는 야옹거리며 계단을 내려갔다. 그러면서도 계속 뒤를 돌아본다. 헉, 설마. 나보고 지금 따라오라는 건가? 불현듯 뇌리를 스치는 매탈남의 영상! ..